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의 무대도 예리코이고 주인공은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그리고 어제에 이어 오늘의 주인공도 구원받는 아주 흐뭇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어제의 소경이 사회적 약자이고 그래서 불쌍한 사람이었다면
오늘의 자캐오는 약자는 아니고 그래서 불쌍하긴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불쌍한 사람이며 어쩌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관장이었다면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강점기 일본의 앞잡이처럼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동족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이었으니
그가 일생 받은 것은 경멸과 냉대뿐이었고
그가 일생 가지고 산 것은 지독한 소외감과 죄책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 사이에서 멀어져 오래 살면서 그 불행도 깊어졌을 겁니다.
사람 사이에 끼지 못하니 사람도 아닌 듯 살아왔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예수님 소문은 들려왔습니다.
세리와 죄인과도 식사를 같이하신다는 소문이.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하느님께서는 똑같이 비와 햇빛을
내려주신다는 말씀이 그분 입에서 나왔다는 것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분이 자기도 받아주실지 그래서 궁금하였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은 다 자기를 외면해도 그분만은
자기를 받아들여 주실 마지막 딱 한 사람이길 바랐을 것입니다.
그 바람이 하도 컸었기에 그는 그분이 지나가시는 길로 나갔습니다.
이 길은 주님께서 그에게 오시는 길이었고 그가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지만 실은 열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작음이 열망을 크게 하는 거였습니다.
마치 가난이 풍요를 더 열망하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 그의 가난과 작음과 열망을 보시고 주님께서
그의 집에 가자고 청하기도 전에 제의하고 초대하십니다.
이는 마치 가출한 집으로 다시 데리고 돌아오는 격이고,
이는 자캐오 집안이 구원되는 일에 있어서 그 시작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하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에 사람들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리지만
주님께서는 자캐오 하나가 아니라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룬 가정과 집안이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 이루어 주시는 가정과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느님께 돌아서면
혼자만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공동체가 같이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집안이 구원받는 그런 구원을 받으라고 자극과 도전을 받는 오늘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