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로마서의 시작이고 인사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사를 찬찬히 읽으면서 저는 오늘 또 다른 점을 묵상하게 됐습니다.
저는 보통 편지를 쓰면서 사랑하는 누구에게 편지를 쓴다고 인사합니다.
저의 사랑을 얘기하고 저와 관계 차원에서 상대를 바라보며 인사합니다.
놀라운 것은 바오로 사도가 자기와 로마 신자들의 정체성을 얘기하면서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 받고 선택받은 자라고,
로마 신자들도 성도로 부르심 받고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라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지 내가 아니고,
로마 신자들도 하느님의 사람이지 ‘너’ 또는 ‘그’이거나 ‘나의 너’가 아닙니다
제가 일찍부터 신앙인이었고 수도자와 사제가 되었지만
저는 그저 나였거나 어떤 수도자 또는 사제였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첼라노가 쓴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읽다가
프란치스코를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첼라노가 계속 지칭하는 것을 보고,
또 강도에게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프란치스코가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대하신 임금의 사신이라고 답하는 것을 보고, 저도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 관계에서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이랬으니 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너,
하느님께 사랑받는 너로 곧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나의 너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나와의 친소 관계로 많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여 친구로 선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식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부르심 받고 선택받은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좋으면 선택하고 싫으면 멀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저의 어머니는 거의 끝까지 아니 돌아가신 뒤에도,
종종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저의 어머니로 붙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신 분이라는 것보다
하느님 빼고 저의 어머니인 경우가 많았고 아직도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와 하느님 뻬고 내가 어떻게 있을 수 있고,
하느님 빼고 어머니가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하느님 빼고 어머니와 저의 관계나
또 저와 다른 모든 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 성찰하며
새롭게 관계도 맺고 새롭게 사랑하며 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너를 사랑하기로.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