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는 사도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여인들을 데라고 다녔으며, 그 여자들이 자기들 재산으로 사도들의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복음서를 읽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그렇게 했음을 알라고 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여기서는 모든 피조물이 새로 나서 하느님의 영광에 첨여하게 되리라고 강조한다. 이것으로 보건대. 엑카르트가 우리 안에서 이들이 탄생했음을 알려는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피조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 “하느님은 만물 속에 있으니,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아라. 여러분이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표지, 여러분이 그분의 맏아들로 태어났음을 알리는 표지일 것이다.“ 이와 같이 엑카르트가 말하는 셋째 오솔길의 시금석은 첫째 오솔길로 돌아가서 피조물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돌파의 경험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우리를 피조물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 셋째 오솔길은 결코 첫째 오솔길과 단절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우리는 바오로가 말한 대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 된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된다.(472)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4-17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누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주님의 기도- 기도의 모범
XII. 이미 존재하는 기도문을 따라 기도를 하든, 기도하는 사람이 생각해 내어 기도를 하든 간에 우리가 다른 말들로 기도한다 해도 그것은 주님의 기도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우리의 처지에 맞추어 다시 기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들어 있는 이 기도문과 일치할 수 없는 내용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어떤 기도를 하는 사람은. 허가되지 않은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영적인 방법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주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을 그들이 본 것처럼, 주님의 위대하심이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보게 하소서(집회 36,3) 라고 기도하고 “당신 예언자들의 말이 참되었음을 보여주소서"(집회 36,15) 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고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만군의 야훼여,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당신의 얼굴 보여 주시면 우리가 살아나리이다”(시편 80,7)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당신 약속에 힘을 얻어 꿋꿋이 걷게 하시고 악이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119, 133) 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