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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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주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상징들
그 여자는 아직 말씀과의 친교에 들지 못했습니다. 아직 죄인이었거든요. 여자는 자기에게 있는 가장 값진 물건인 향유로 주님께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런 다음 머리의 회관, 곧 머리카락으로 주님 발에 남아 있는 향유를 닦아 드렸지요.
여자는 주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용서받았지요.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그분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분 발에 향기로운 기름을 부은 것은, 거룩한 가르침의 향기와 명성이 땅 끝까지 퍼지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시편 19,5 ; 로마 10,18)고 쓰여 있습니다. 향유에 젖은 주님의 발은 바로 사도들이지요. 그 향유에서 나는 달콤한 향은그들이 성령을 받음을 예시합니다. 주님의 발은 복음을 전하고자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사도들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이 본문으로 보건대, 우리는 엑카르트가 “아빠, 아버지”의 의미를 주해하여 아버지를 “순수한 낳음”과 ‘만물의 생명”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바오로는 우리의 자녀 됨이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과 관련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렇게 한 뒤에 “엄청난 해산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미 살펴본 바 있듯이. “엄청난 해산의 고통이야말로 엑카르트의 영성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를 구성한다. 혹자는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한 언급이야말로 엑카르트가 말하는 셋째 오솔길의 진정한 출발점, 이른바 뚫고 나가서 자기와 하느님을 낳는 길의 출발점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장차 우리에게 드러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상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한 것은 본의가 아니라 굴복시키신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피조물 자신도 썩음의 종살이에서 마침내 하느님 자녀의 영광스런 자유로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거니와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이 우리와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의 첫 열매를 지닌 우리 자신도 아들 됨을,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알거니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과 하느님의 뜻대로 부름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일이 울력하여 좋은 일을 이룹니다. 하느님은 미리 알아두신 이들을 당신 아드님의 모습과 한 모양이 되도록, 그래서 이 아드님이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 되도록 예정하셨습니다(로마 8,18-23.28-29)(472)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4-17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내적 생활
원장은 이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서 레이라아의 주교께 파티마의 사건에 대해 루치아에게 신중히 질문할 허가를 청했다. 허가는 내렸으나 어려운 조건부인데다가 더구나 제한되어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원장은 침묵하는 이 영혼을 백방으로 시험해 보았고 사방팔방으로 공격도 하고 때로는 은근히 교묘한 질문의 화살을 던지기도 했으나 루치아는 반쯤 꺼진 소리로 “네”, “아니오”라고만 대답할 뿐 조금도 의문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원장은 발현을 본 당사자는 파티마의 사건을 다 잊었다고 지레짐작을 해버렸다. 어느 날 이 사정을 확인하려고,
“당신은 파티마에서 성모님과 당신 사이에 얼어난 사정을 기억합니까 ?
아마 다 잊었겠죠?"
이 말을 들은 루치아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잊다니요 ..... 한 순간도 생각지 않은 때가 없는 걸요…."
루치아는 이제 18세가 되어 갔다. 기숙사 생활은 끝나 가고 있었고 그녀는 교양 있는 처녀가 되어 있었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느질에는 어떤 것이든 아주 취미가 있어서 솜씨곱게 열심히 빠르게 하면서 늘 선생의 지시를 앞서 기다렸고 언제나 향상 일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모난 그녀의 성격, 거칠었던 언행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은 그녀가 새 생활을 하면서 얻은 은총이었고 동시에 그녀 자신도 전력을 다해 교정하려고 한 노력의 덕택이기도 했다.
그녀를 대할 때 특별히 느끼게 되는 것은 그 고요함과 매사에 균형을 간직하고 언제나 같은 기분으로 있는 그것이었다. 그녀는 신경관능증도 아니고 신경질도 아니며 물론 감상가도 아니었다.
어떤 선생의 말에 의하면, “나는 그녀가 고향을 그리면서 우는 것을 꼭 한 번 보였읍니다”라는 것이었다.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