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냥 십자가 현양 축일이 아닙니다.
그냥 십자가는 당시 가장 끔찍한 사형 틀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우리가 현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형 틀에 주님께서 스스로 못 박히셨기 때문이고,
사랑 까닭에 또 승리하기 위해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선 주님의 사랑을 현양합니다.
성 십자가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겁니다.
떠밀려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보통 그리스도의 수난(Passio Christi)이라고 합니다.
수난(受難)을 직역하면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지만,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랑 까닭에 죽음의 십자가를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만 Passio이지
무의미하게나 억지로 받아들인 것은 Passio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는 생명의 형틀로 바뀝니다.
사랑의 승리요 Passio의 승리이고,
이것이 죽음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믿고 현양하는 사람만이 죽음을 이기는데
이것이 오늘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생명과 승리의 처방이라는 뜻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불만으로 죽게 됩니다.
왜 불평불만을 하게 됐냐면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는 것이 다른 번역에서는 참지 못하여
또는 인내심이 바닥나서로 번역되는데 어쨌거나
눌러왔던 여행의 불만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터트린 것이 불평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편히 살고 싶은 것이 그들의 욕구이고,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그들은 지금 욕구불만이고 불평한 것인데
하느님께서도 그 불평을 내내 참아주셨다가 이번에는 작정하십니다.
참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도 이젠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극약처방을 내리시는데 죽을래 살래 물으시는 겁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싫어 광야에서 죽을래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계속 가 살래 물으시는 것이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어쩔 수 없이 둘 중의 하나 선택해야 합니다.
고통을 못 견디겠다는 사람은 죽음을 선택할 것이고,
어떻게든 살겠다는 사람은 고통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백성들은 사는 쪽으로 선택했고 고통을 감수하기로 선택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리 뱀을 높이 달고 직시하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최악인 죽음을 직시하면서 차악인 고통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에서도 얘기하는 두려움(Phobia)을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두려움은 피하고 도망칠수록 더 두려워 지게 되어있기에
직면해야지만 이길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직면해야 하는데 용기로만 직면할 수 없고,
사랑 그것도 Passio의 사랑으로만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범으로 보이신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선택이고,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