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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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마태 1,18)
예수님의 불멸성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뒤에도 변함없다
왜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 처음에는 ‘나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탄생’을 이야기할까요? 첫머리에서는 ‘나심의 책’(마태 1,1)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마태 1,18)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탄생’과 ‘나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탄생’과 남은 다룹니다. ‘남’ 또는 ‘생겨남’은 본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탄생’은 죄를 지어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에게서 사람이 이어 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은 불멸성과 죄없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태어남’은 정념과 죄에 매인 어떤 것을 암시합니다. 영원히 ‘나신’ 분인 주님은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태어나심은 불멸의 존재인 그분의 영원한 ‘나심’을 훼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나심으로써, 영속하지 않는 것을 취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죄의 지배 아래 놓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태초의 아담의 모습을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으므로 타락이나 죄의 가능성이 조금도 스며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경우, ‘나심’은 무존재에서 존재가 되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시다가 “종의 모습" (필리 2,6)을 취하신 ‘옮아감’(바뀜, 길)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태어남과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보다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뛰어난 태어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 말하자면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신화야말로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신학에서 누차 되풀이되고 부연되는 흔한 주제다. 예컨대,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혼은 하느님만을 누리고 하느님만을 기뻐할 정도로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을 몹시 사랑하고,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복을 받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그 외에 사람이 무엇을 더 바랄 것이며, 무엇을 더 알려고 하겠습니까?
그는말한다.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에게 신적인 존재를 주시고, 자신에게 붙여진 것과 똑같은 이름으로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사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엑카르트는 사람은 사랑에 의해 자기가 사랑하는 그 대상이 된다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이단 사설처럼 들립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둘이 아니라 하나와 일치만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 속에 있을 때보다는 사랑 안에 있을 때 더더욱 하느님이 됩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신들이다. 너희는 모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자녀들이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 말은 엄청난 소리로 들리지만, 그것은 영원한 진리 속에서 보면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464)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1-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루카 12,2-12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