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이 헤로디아라는 한 여자의 앙심 때문에 죽었을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소녀의 그까짓 춤 값 때문이었을까?
이 축일을 지낼 때마다 드는 의문입니다.
왜냐면 세례자 요한이라면 더 큰 사명을 수행하다가 죽어야지
이까짓 여자들의 앙심에 의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맞는 생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여자들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은 것이고,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구자라는 그의 운명에 따라 죽은 겁니다.
이런 면에서 의문을 가진 사람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를 보면 베다 성인도 같은 의문을 가졌으며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의미를 타당하게 부여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목숨까지 바치게 된 것은 우리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박해자가 그를 보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라 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 말라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친히 ‘나는 진리이다.’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때문에 죽고 진리를 위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면에서
주님과 세례자 요한은 샴쌍둥이입니다만 같은 운명의 쌍둥이일지라도
순서 면에서는 같지 않고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진리 때문에 죽고 진리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면에서는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 다른 점은 먼저가 아니라 그 모범을 따라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본받기 위해서는
그의 용기와 사랑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의 주님이 말씀하시듯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을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을 용기는
세례자 요한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지만 사람들 앞에 서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는 그에게,
하느님 앞에 서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안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그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때문에 죽고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세례자 요한의 용기를 본받기 위해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하는 한편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