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주님께서 신랄하게 나무라시는데
어제는 눈이 먼 상태에서 하느님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셨다면
오늘은 그들의 위선에 집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위선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되면서
위선의 깊은 뿌리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철학 중에서도 최고의 철학인 고대 형이상학은
존재의 문제나 진선미와 같이 난해한 주제를 다루지요.
위선에 관해 얘기하다가 왜 느닷없이 진선미에 관해 얘기하나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형이상학에 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오늘은 제가 왠지 진선미와 함께 위선을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진선미를 사랑하고 자기가 진선미의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스코리아를 뽑을 때도 진선미로 뽑고,
남자는 남자 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아름다워지려고 할 뿐 아니라
화장하거나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아름다워지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자연미를 얘기하며 비판하곤 하였지만
요즘은 자기 사랑의 차원에서건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건
일종의 사랑이라고 좋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실 아름답기를 포기한 사람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고,
흉한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은 이웃 사랑을 포기한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외모만 아름답고 속은 추하디추하다면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요.
어쨌거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아름답기를 바라고,
그래서 실제로 아름다워지려고도 하고 겉꾸밈을 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위선도 같은 맥락에서 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선(眞善)이거나 진선이 되어야 하는데 진선이지도 않고
진선이 되려고 해도 못 되니까 위선(僞善)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진위(眞僞)를 가리면 위(僞)라는 말입니다.
작품으로 치면 자기가 진짜로 쓰거나 그린 작품이 아니라 위작(僞作)입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대로 우리 인간은 위작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성인일지라도 위작자나 위선자일 수밖에 없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은 제 생각에 이런 자기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야 위선을 고칠 수 있게 되고 오늘 주님께 불행 선고받은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불행하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암 선고받은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암 선고받고 그 선고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고치지 않을 때 불행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한번은 위선과 관련하여 심한 가책을 느꼈습니다.
사순절에 의사의 처방에 따라 닭고기 국물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가 사순절에 금식과 금육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자기가 닭고기 국물을 먹고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위선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자기를 끌고 다니며
‘닭고기 국물을 먹은 걸터듬이를 보시오’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역시 의사 처방으로 위 보호를 위해 천을 수도복에 대야 할 경우에도
남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속으로 대지 말고 겉으로 대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부자 청년이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고 하셨지요.
속에 악이 가득한데도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처럼
그것을 감추거나 오히려 선으로 겉꾸밈 하려고 하지 않고
프란치스코처럼 속의 것을 겉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이,
주님처럼 나는 선하지 않고 하느님만이 선하다며
하느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위선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