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게 죄지은 사람을 타이르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쉽다고 얘기했지만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바지요.
그러므로 오늘은 용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인지 두 말씀을 엮어서 묵상해 봤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말씀이라고 제게 이해가 되었고
일흔일곱 번은 해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됐습니다.
왜 이런 묵상을 했냐 하면
우리는 용서에 있어서 실패를 자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한 것 같은데 흙탕물이 다시 올라오듯 다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올라오고,
그래서 다시 또 용서했는데 어떤 계기로 다시 또 감정이 올라오고는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앙금이 남아있고 근절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앙금이 남아있으면 조금만 휘저어도 가라앉아 있던 것이 올라오고,
근절이 되지 않으면 종기가 다시 생기듯 감정이 다시 올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적지 않고 쉽지 않지만
일곱 번 용서하는 것으로 한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봤듯이 미움의 뿌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거기서 미움과 분노가 다시 살아나고 했던 용서는 물거품이 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의 뜻이 실은
숫자 몇 번이 아니라 근절될 때까지를 말함입니다.
사실 숫자를 헤아리며 용서하는 것은 용서의 자세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용서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마지못해서 그리고 의무적으로 하려는 자세이고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용서했다면 미움과 분노가 다시 솟아오르지 않겠고
그가 내게 죄를 짓고 또 지어도 그를 위해 수천 번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겁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어느 관구장에게 훈계합니다.
“죄를 지은 형제가 그대의 눈을 바라보고 자비를 청했는데도
그대의 자비를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형제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도록 하십시오.
나는 그것으로 그대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그분의 종이며
그대의 종인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자비를 청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가 자비를 원하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런 다음에도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그를 주님께
이끌기 위하여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이런 형제들에게 늘 자비를 베푸십시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도전과 자극도 받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랑하려는 의지와 마음이 없이 용서하려고 하면 한숨만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부터 성급하게 하려 하거나 횟수를 따지기에 앞서
사랑을 마음에 채우는 것이 앞서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