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내게 죄지은 그러니까 남에게 죄지은 사람이 아니라
내게 죄지은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퍼뜩 드는 생각은 사랑하기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이 남에게 죄지은 사람을 사랑하기도 힘든데
내게 죄지은 사람을 타이르라고 하시니 얼마나 힘듭니까?
다른 사람을 타이르라고 하면 차라리 쉽겠습니다.
그냥 용서해 버리라고 하심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내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이 타이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를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은 그러나 사랑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미움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미움을 붙들고 있기에 내내 나를 괴롭게 할 뿐이고,
내내 나를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럽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자유와 평안을 위해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이
진정 지혜롭고 진정 나를 위한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진정 사랑한다면 용서+타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에 타이름을 더할 때 형제 하나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제 하나를 얻게 된다는 말씀은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든다는 소유의 뜻이 아니라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다는 사랑의 뜻입니다.
타이름을 통하여 그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니 사랑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가 나의 타이름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잘못을 고쳐준다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쉬우며 한 사람을 얻으니 주님 말씀대로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그런데 거의 틀림 없이 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고 그래서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이르는 사랑까지 하려고 한다면
내 사랑이 거부당할 각오까지 해야 하고,
거부당할 뿐 아니라 미움까지 받고
관계가 끊어질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은 그뿐이 아닙니다.
혼자서 안 되면 그렇게 애썼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뒷담화하지 않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열성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그를 공동체에 알려야 한다고까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하려고 한다고 사랑할 수는 있습니까?
압도적인 사랑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이 그의 죄와 그의 거부와 그의 미움과
그의 고집을 압도하지 않으면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받아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용서+타이름의 사랑을 하라는 명령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의 그 압도적인 사랑도 받아 사랑키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가 돼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