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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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4)
모든 지성은 성령에게서 오며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합당하고 뛰어나며 선택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만 주어진다고 더 상세히 논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모든 이성적 영혼에게는 선악의 차이를 이해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누구나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은총을 받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인 이성적 지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므로, 신비를 아는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은 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잘못이 아니라 청하지 않고 하늘 나라를 맞아들일 준비를 갖추려 하지 않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선악에 관한 이 일반적인 지식을 추구한다면 (다시 말해 여러분이 알 수 있는 것을 좋게 시용한다면) 여러분은 신비를 아는 특별한 지식을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연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 주어진 그 일반적 지식을 땅에 숨긴다면, 선한 뜻과 행실에 대한 상으로 마련된 특별한 지식을 무슨 자격으로 받겠습니까?
-마태오 복옴 미완성 작품-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이러한 탄생을 일으키고, 이러한 탄생이 자신들 안에서 완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신들의 활동으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고요히 입을 다물고 평화로이 있으면서,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활동하시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그분에게 맞추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전에 말씀드린 것을 되풀이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요히 업을 다물고서 하느님이 활동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모든 덕의 본질을 자신 안에 받아들여, 그 덕들이 실로 자신에게서 흘러 나오게 하는 사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삶과 고귀한 가르침을 자신의 마음속에 생생히 담아 둔 사람, 곧 선하고 완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고요히 입을 다물고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활동하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값지고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들을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기능이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모든 상을
여윌 때, 비로소 이 말씀이 들려옵니다. “침묵 한가운데서 은밀한 말씀이 내게 들렸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든 능력을 통일시키고, 여러분이 받아들인 모든 대상과 상을 잊으면 잊을수록, 여러분이 피조물과 그들의 상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여러분은 그 은밀한 말씀에 더 가까워질 것이고, 그 말씀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물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도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바울로 사도가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2코린 12, 2)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몸을 잊을 정도로 바오로 사도의 영은 모든 기능을 완전히 여의고 자신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는 기억과 이성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고, 감각과 기능도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생명의 불꽃과 몸의 온기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그의 몸은 전혀 축나지 않았습니다.(433)


<금주간 성서읽기> 갈라 4-6장 / 필리 1-4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루치아는 이런 새 부탁에 관해서도 주교에게 한 약속과 마찬가지로 놀라우리만큼 충실하였으며 함구령이 풀릴 때까지 완전하게 지켰던 것이다.
그녀는 고바의 발현이나 순례에 관한 사정은 조금도 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뿔또와 풀라가에 두 번이나 면회하러 오신 어머니에게까지 한마다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적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13세 한창 나이의 소녀, 그 마음은 끊임없이 호랑가시나무의 귀부인께로 날아갔으련만 …. 그 어떠한 희생이었을까!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그녀는 ‘통고의 마리아’라고 불리우기에 마땅하였다.
“나는 예수의 루치아니까 의당 예수의 마리아이기도 하다.”고 오늘날 그녀는 말한다.
외출 금지령만은 풀려 있었다. 흑백 바둑판 무늬의 유난히도 눈에 뜨이는 고아원의 제복을 받아 입고 다음 선생에게 소개되었다.
이리하여 고바 다 이라아의 발현 목격자 루치아는 기숙생들 안에 뒤섞여 버렸다. 호기심 많은 무리가 루치아가 고아원에 있다는 낌새를 알고 루치아라는 학생이 있지 않느냐고 찾아와도 의리 있는 문지기 수녀는,
“그런 학생은 없어요.”
하고 아주 단순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통고의 마리아’는 퍽이나 오랫동안 알쥬스트웰의 시골뜨기에서 헤어나절 못했다.
선생에게 대해서는 단순하였으나 그리 똑똑한 모양을 하지 못했고 친구들 간에는 그녀의 독특한 고집을 부리면서 무뚝뚝한 항변을 하거나 완고한 태도와 까다로운 성미에서 나오는 애교 없는 모양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누군가의 감정을 상했다고 인정하면 즉시 온순히 용서
를 빌었다.(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