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사랑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업적과 공로와 희생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말씀에 굴복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여 일상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을 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일상의 관계에서 그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이해를 세속적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이해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 자유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성한 자유는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의 참 자아로 존재하는 방식에서 나오는 자유입니다. 자기의 내적이고 진정한 본성을 할 수 있는 만큼 실현하고, 자기가 해야 하는 줄로 아는 바를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자유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안에서 그런 자유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세속의 자유는 개별적이고 사적인 자유만을 만들어 냅니다. 너와 공동체가 자유로운 그런 관계는 만들지 않습니다. 네가 자유로워야 내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단절이 발생하고 폭력이 나옵니다. 공동선은 우리로부터가 아니라 남들을 위하여 요구되고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을 줍니다. 그때 우리는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됩니다. 깊고 진실한 우리가 됩니다.
포장하고, 증명하고, 자랑하고, 비교 평가하고, 경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에너지를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에너지를 낭비하기에 자유로울 수 없으며 심각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폭력과 질병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받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거나 따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자유가 사랑하는 자유로 관계를 만듭니다. 은총과 자유는 같은 길을 갑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나의 자유를 내어드리고 말씀에 굴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자유를 받아들여 일상의 관계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자기의 업적과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려고 한다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어디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을 떠난 사람이 중심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중심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질 것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씨앗처럼 자유롭습니다. 분출되는 기쁨이 더 큰 자유로 너와 피조물 안에서 자신으로 가득 찬 나를 빼내도록 돕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로 우리를 먹이신다면 그분을 받아 모신 나는 나를 필요로 이들에게 나를 내어줌으로써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으로 누군가에게 자유를 줄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을 배우는 학교는 우리의 관계이며 하느님과 나, 너와 나, 피조물과 나, 나와 나 사이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시는 선을 배워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