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
분별력이 무너지면
여러분의 눈이 완전히 멀었다면,
여러분이 금이나 비단을 걸치려 하겠습니까?
겉모습에 불과한 것보다, 건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건강을 잃거나 나빠지게 만든다면,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멀면 다른 지체들도 기능이 약해지고,
빛이 꺼지듯이, 정신이 타락하면 삶은 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눈을 건강하게 지키려 애쓰듯이,
영혼의 눈, 곧 분별력을 지키는 일에도 늘 힘써야 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을 밝혀주는 ‘눈’을 해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겠습니까?
생의 흐름이 막히면, 강물이 말라 버리듯,
분별력이 무너진다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행위는 뒤죽박죽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니 짙겠느냐?’리고 히십니다.
키잡이가 물에 빠져 죽고 촛불이 꺼지고 지휘관이 포로로 잡혀 가면,
그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엑카르트는 이 주제를 우리의 영적 여정에 적용합니다.
그는 단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열매를 맺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을 마음 안에 모셔들이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이러한 수용성 속에서 인간은 ‘처녀’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말합니다:
더 좋은 일은, 그 안에서 하느님이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부인(婦人)’이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쉬르만(Schürmann)은 엑카르트가 이 구절에서
일종의 언어적 유희를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독일어 단어 Empfangen(엠팡엔)은
동시에
받아들이다(수용하다)
임신하다(수태하다)
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수용성’(Empfänglichkeit)은
단순한 수동적 열림이 아니라,
출산의 경험—곧 하느님 체험을 창조적으로 열매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경험에 수동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경험을 창조적으로, 열매 맺는 방향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엑카르트는 말합니다:
“최상의 비움인 초탈(Gelassenheit, 버림) 속에서만
인간과 하느님은 하나가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단 하나의 결심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결합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출산의 결심’이다.”
엑카르트에게 있어,
열매를 맺고 ‘부인’이 되는 것은
단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처녀로 머무는 것보다 더 높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유 속에서,
행동과는 거리가 먼 관상의 형태—곧 고립되고 폐쇄적인 관상주의—를 비판합니다.
쉬르만이 지적한 것처럼,
엑카르트의 영성은 ‘관상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관상에서 실천, 수용에서 출산, 침묵에서 열매 맺음으로 나아갑니다.(411)


<금주간 성서읽기> 마르 14-1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VI. 사람이 한시적인 풍족함을 성취한 것을 넘어서서 이제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높은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해도 되겠습니까? 높은 지위를 단순히 그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어울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허영에 의해 추구하거나 결국 해로운 결과만 가져올 뿐인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기 위해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일상의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 필요한 물건들을 얻고자 하는 것에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것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6-10)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