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저는 선행에 있어서 아직도 회개에서 멀리 있습니다.
이는 제가 아직도 악행을 저지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저는 의도적으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고,
할 수 있는 한 선행을 하려고 하지만
선행을 함에 있어서도 회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회개가 필요한 선행은 어떤 선행입니까?
겉으로 보면 선행이지만 거짓 선행 곧 위선적 선행입니다.
위선적 선행이란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거나
순수하지 않은 선행 곧 불순물이 있는 선행입니다.
첫 번째 불순물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불순물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 선행만큼 뿌듯한 만족도 없습니다.
세 번째로 교만에서 비롯된 선행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사(下賜)의 개념입니다.
하사란 왕처럼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뭣을 내려 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제겐 이런 위선적 선행도 많고 그래서 이런 선행에 대해 회개해야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선행을 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으로 하지 않는 선행이 바로 제가 더 회개해야 할 선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제가 회개해야 할 것은
선행이건 악행이건 거기에 하느님이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실로 우리는 윤리적이고 심리적이고 철학적이지만
하느님이 빠져있는 비신앙적인 회개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옛날의 저는 이런 회개에 초점이 있었고,
그래서 보이기 위한 것의 문제점만 많이 봤습니다.
보이기 위해서 선행을 하다 보면
-남의 눈치를 보다 줏대를 잃게 되는 문제점,
-보지 않으면 선행을 하지 않게 되는 문제점,
-기껏 선행을 하고도 왠지 허탈하게 되는 문제점,
-나의 행불행이 남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점을 보면서
자기가 실종되는 것의 문제점만 느꼈지 하느님 실종의 문제는 보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이제 하느님 앞에 가야 함을 생각하면서
하느님 앞에 가야 하는데 아직도 사람 앞에 있구나!
이러다 갑자기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점이 보이면서 내가 있고 줏대가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신앙적인 회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껏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여자 눈치만 보던 사람이
이제 부모 앞에 돌아가야 함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은 실로
자기 줏대도 잃고 하느님도 잃는 멍청한 짓입니다.
그러니 이런 멍청한 선행을 하느니
악행일지라도 다윗처럼 하느님 눈앞에서 저지르고,
그런 다음 하느님 눈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