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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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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1월 30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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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18-20)

그 가난한 어부들이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
혹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이 아니라 뜻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에 애착하기 쉽고 우리가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것들에 좀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것과 그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 마음대로 탐낼 수 있었던, 그들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만큼 많이 버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많이 버린 것을 보고 ‘이 세상을 경멸하는 저 사람을 본받고 싶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버릴 것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속된 욕망을 끊으면, 여러분은 많은 것을 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밖의 것은 아무리 조금이라도 충분하다고 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재물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희생을 얼마나 많은 것이 관계되어 있나로 판단하시지 않고, 그 희생이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십니다. 물질로만 따지자면, 우리의 거룩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그물과 배를 천사들의 영원한 삶과 맞바꾸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도대체 하나 됨은 무슨 뜻인가? 하나 됨은 부정의 부정이자 거부의 거부다. 그것은 모든 분리의 철폐, 대립과 차이의 용해다. 피조물들이 하나 됨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분리되어 있고, 대립되어 있으며,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지느라 분주할 따름이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부정이 들어 있다. 피조물은 저마다 다른 피조물이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러한 부정이나 그러한 거부 속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하나다. 그분은 부정의 부정이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안에 있다.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들도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신성 안에서의 하나 됨을 보도록 초대를 받는다. 하느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부정의 이름이다. 우리는 “하느님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하느님은 무엇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통해서 더 깊이 알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 최고의 긍정은 부정이다. “하느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부정도 아니고,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하느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부정의 부정이다. 하나는 부정의 부정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하나다. 부정의 부정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충만한 긍정이다."ㄴ 하느님은 분리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고, 거부도 아니다. 하느님은 하나 됨이며 부정의 부정이며, 거부의 거부다. (287)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4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1티모 1-6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대승불교의 반야공 사상이 말하려는 본래 의도는 인간의 주체적 자아의 허망한 집착과 희론에 근거한 허구적 우상들을 파사현정하려는 적극적 인 것이었다. 파사(破邪)가 곧 현정(顯正)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론(中論)의 공(空) 사상이 '부정의 논리'에 치우친 나머지 진여, 일심(一心), 묘공(妙空)이 담지하는 더욱 적극적이고 생산적이고 충만한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다고 보고, ‘마음이 갖춘 궁극적 실재성과 만법(萬法)이 ‘한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유심연기(唯心緣起)설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제 원효, 의상, 지눌 등 한국 불교의 기라성 같은 거성들이 말해 온 한 마음’(一心)이 무엇인지를 알이보자. 우선 ‘일심'이라는 어휘에서 매우 잘못된 오해 두 기지를 걸러내야 한다. 첫째는 테카르트가 말하는 사유 주체로서의 개체아의 ‘자의식'이 곧 불교가 말하는 ‘일심' 이라고 오해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현대 심리힉에서 말하는 희비애락 같은 감각 작극에 반응하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기세를 일심(一心)이라고 좁게 해석하는 오해이다.
물론 깨닫고 보면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인 ‘절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일심 곧 한 마음이란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것이며, 불교적 용어로서의 ‘진리 그 자체'인 진여에 대한 보다 대중적인 표현이다. 일심은 큰 마음이요, 밝고 환한 우주적 마음이며 , 만유를 포용하고 길러내고 생성시키는 한민족의 ‘하느님' 에 대한불교적 표현이다. 대승 불교의 핵심 진리를 간명하게 추려낸 논서(論書)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마음 진여는 오직 하나의 실재,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본체"이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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