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1,29-32
군중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도,
‘더 확실한 보증’을 내놓으라 조른 것입니다.
보증을 요구하는 자리에는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사랑도 그러합니다. 증명을 요구하는 사랑은 이미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만을 주시겠다 하십니다.
요나가 누구입니까?
원수의 도시 니네베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싫어서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친 예언자입니다.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낸 뒤,
마지못해 니네베로 가서 한마디를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성의 없는 외침, 마음 없는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도시 전체가 회개했습니다.
여기에 두 겹의 표징이 있습니다.
첫째, 요나가 사흘 만에 물고기 배에서 나왔듯
사람의 아들도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요나의 ‘말씀 선포’가 니네베를 돌이켰듯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징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그런데 슬픈 대조가 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성의 없는 요나의 한마디’에 회개했는데,
‘요나보다 더 크신 분’ 앞에서도 이 세대는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 땅끝에서 달려왔는데,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 곁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리게네스가 말했듯,
말씀은 이미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부족한 것은 ‘열린 마음’입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눈으로 보면
요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하느님의 친절’입니다.
니네베는 이스라엘을 짓밟은 잔혹한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원수의 도시에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그것이 못마땅해 화를 냅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어찌 저 큰 성읍 니네베를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리 안에도 ‘요나’가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되는 것, 용서받는 것이
괜히 불편해지는 마음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친절은 늘 우리의 울타리보다 넓습니다.
어제 임금이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부르셨듯이.
친절의 첫걸음은, 미운 이의 회개와 행복까지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더 확실한 표징(보증)’만 요구하며 믿음을 미루지 않는가?
나는 이미 주어진 말씀 한마디에 마음을 돌이키는가?
내 안의 ‘요나’ ―원수의 회개를 못마땅해하는 마음― 는 없는가?
나의 친절은 하느님의 넓은 친절을 닮았는가?
주님,
표징을 요구하며 믿음을 미루지 않게 하소서.
주어진 말씀 한마디에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
원수에게까지 넓으신 당신 친절을 닮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