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2,1-14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모든 민족을 위한 잔치’(오늘 제1독서),
곧 하느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이 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밭으로,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갑니다.
잔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관심 ― 이것이 사랑의 반대편입니다.
그러자 임금은 종들을 큰길로 보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종들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데려옵니다.
루카 복음은 같은 비유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놀라운 ‘친절’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격을 묻지 않으시고, 사람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성인들의 집이 아니라 ‘죄인들의 병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서늘합니다.
임금이 들어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십니다.
“친구여, 그대는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들어왔나?”
거저 초대받았는데, 왜 예복을 따지실까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풀어 주셨습니다.
‘혼인 예복’은 본질적인 것, 곧 ‘사랑’을 상징한다고 말입니다.
성경 주석가들도 그것을 ‘선행으로 가득 찬 회심한 삶’이라 읽습니다.
성 예로니모가 말씀을 삶으로 옮겼듯,
초대는 거저 받지만 ‘사랑은 살아 내야’ 합니다.
잔칫방에 몸만 앉아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는 잔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은총은 값없이 오지만, 응답 없는 은총은 열매 맺지 못합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 ‘친절과 선행’의 주간이 열립니다.
먼저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친절’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큰길에서 불러들여 잔칫상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입어야 할 ‘예복’은 무엇입니까?
받은 친절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선행’입니다.
친절은 하느님을 닮는 일이고,
선행은 그 친절이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1티모 3장도 봉사자에게 ‘손님을 후대하라’ 권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초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친절을 닮았는가?
나는 잔칫방에 앉아 ‘사랑의 예복’을 입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몸만 앉은 것인가, 사랑으로 살아 있는가?
주님,
당신의 초대를 무관심으로 흘려보내지 않게 하소서.
사람을 가리지 않는 당신의 친절을 닮게 하시고,
사랑의 예복 ―친절과 선행― 을 입고 살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