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3,27-32
주님께서는 어제 ‘잔의 안과 겉’을 말씀하신 데 이어,
오늘은 더 강렬한 그림을 드십니다.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그 시대에는 파스카 전에 무덤을 ‘하얗게 칠했습니다.’
순례자들이 모르고 무덤에 닿아
부정하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겉으로는 ‘하얗고 아름다웠지만’,
그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했습니다.
주님께서 찌르시는 것은 바로 이 ‘틈’입니다.
‘겉의 아름다움’과 ‘속의 죽음’ 사이의 틈,
‘보이는 의로움’과 ‘속의 위선’ 사이의 틈입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이 ‘외식(外飾)’ ―겉을 꾸미는 일―을
영혼의 가장 위험한 병으로 보았습니다.
거룩함은 ‘하얗게 칠한 겉’이 아니라
‘살아 있는 속(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어긋난 삶은,
아무리 화려해도 ‘무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따끔한 말씀은
‘단죄’가 아니라 ‘초대’입니다.
‘회칠’을 벗고 ‘속을 살려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 속’을 살리는 길은 단 하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보는 아르메니아의 ‘생명의 십자가’가
바로 이를 그려 줍니다.
‘죽음의 자리’인 십자가가
도리어 ‘생명나무’로 피어나듯,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은 무덤’을
‘살아 있는 정원’으로 바꾸십니다.
일치의 관점에서 보면
‘회칠(외식)’은 사람 사이를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입니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신뢰가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공동체가 갈라집니다.
반대로 ‘겉과 속이 하나 된 참됨’은
신뢰를 낳고, 신뢰는 일치를 낳습니다.
사랑·기쁨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사랑’에는 회칠이 없습니다.
숨길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롭고,
그 자유 속에서 깊은 기쁨이 솟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겉’과 ‘속’ 사이에는 큰 틈이 있지 않은가?
나는 ‘하얗게 보이려고’ 속을 감추지 않는가?
나의 사랑은 ‘회칠’이 아니라 ‘참됨’인가?
나는 죽은 속을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열어 드리는가?
주님,
‘회칠한 겉’이 아니라 ‘참된 속’을 주소서.
겉과 속을 하나로 이어 주시고,
저의 죽은 무덤을 ‘생명의 정원’으로 바꾸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