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강론을 올린 후 늘 하던 대로 오늘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 복음을 미리 읽었습니다.
그런데 또 위선자를 질책하는 말씀이 나오자 아주 짜증이 나면서
또 이 묵상을 해야 하나? 이젠 제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과
더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교는 너무 사람을 죄인으로 몬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데 이런 묵상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그래도 억지로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지만 여러분을 위해 한다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것인데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입에 쓴 것이 약임을 알면서도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머는 것이 아닐까요?
저의 경우 눈을 감음으로써 눈이 머는 것입니다.
눈을 감아도 눈이 먼 것과 마찬가지로 보지 못하니까요.
내내 눈을 감고 보지 않으면 눈먼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다가 성무일도 낮 기도를 바치는데 시편의 다음 구절이 저를 때렸습니다.
“뜻 아니한 허물이야 누가 다 아오리까?
내 모르는 잘못에서 나를 깨끗이 해 주소서.
행여 교만이 이 종을 지배할세라 막아 주소서.”
아! 또 교만.
많이 겸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교만이 또 저를
보지도 않게 하고 인정도 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이런 묵상이 되면서 어제 나타나엘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어제 나타나엘은 자기의 편견과 과오를 즉시 인정하면서
하늘 문이 열리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와서 보라는 초대에 가서 주님을 뵙게 되었는데
이런 나타나엘에게 주님께서는 더 큰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곧 하늘이 열리고 주님께서 그곳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꼬락서니 곧 자기의 위선과 눈멂을 보는 것,
보기 싫은 자기 꼴을 보는 것에서부터 관상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꼴도 보기 싫지만
자기 꼴/꼬락서니를 보는 것이 제일 싫습니다.
어쩌면 자기 꼴 보기 싫어서 다른 사람을 꼴 보기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눈의 티는 잘 보듯이
자기로 향하는 괴로운 시선을 남에게 돌리려고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님 말씀대로
우리 안이 온통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보기 싫어서 겉꾸밈 곧 위선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으로 이런 자기 꼬락서니를 보는 것에서부터 자기 관상이 시작되고,
이렇게 시작된 관상은 점차 이웃 관상과 하느님 관상으로 이어지고 완성됩니다.
우리는 한가롭게 다른 사람 관상을 보며 관상이 어떠니저떠니 하는,
그런 관상(觀相)은 하지 말고 자기 관상-이웃 관상-하느님 관상으로 이어지는
그런 관상(觀想)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