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8,15-20
형제가 잘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흔히 두 갈래로 빠집니다.
못 본 척 덮어 버리거나,
아니면 여럿 앞에서 망신을 주거나.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삼의 길’을 일러 주십니다.
“가서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이 ‘단둘이’라는 말에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단둘이 만나는 것은
그의 허물을 ‘드러내어 망신 주려는 것’이 아니라,
‘체면을 지켜 주며 살며시 일으켜 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네가 형제를 ‘얻은 것’이다.”
바로잡음의 목적은 ‘이김’이 아니라 ‘얻음’입니다.
끊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살려 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끈기 있게 시도해도
끝내 마음을 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은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을 끝까지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문은 닫히되, 사랑은 닫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더하십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에 있다.”
화해를 위해 마음을 모은 그 작은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함께 계십니다.
일치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친절·선행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도 선행입니다.
다만 그 바로잡음은
언제나 ‘형제를 얻기 위한’ 친절이어야 합니다.
망신이 아니라 회복,
끊음이 아니라 다시 얻음 ―
그것이 일치를 짓는 선행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갈등 앞에서 ‘덮기’와 ‘망신’ 사이만 오가지 않는가?
나는 ‘단둘이’ 다정히 타이르는 길을 택하는가?
나의 바로잡음은 ‘이김’인가, ‘형제를 얻음’인가?
나는 화해를 위해 ‘마음을 모으는’ 자리에 함께하는가?
주님,
형제를 망신 주지 않고 ‘단둘이’ 다정히 타이르게 하소서.
바로잡음의 목적이 ‘얻음’이 되게 하시고,
화해를 위해 모인 자리에 당신께서 함께 계심을 믿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