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당신이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우리는 왜 이 말씀을 듣습니까?
라테라노 대성전을 허물라는 것입니까? 다시 세우라는 것입니까?
축일을 지내며 아무렴 그 성전을 허물라는 뜻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내용처럼 정화할 것이 있으면 정화함으로써
제대로 지으라는 것이고 그것은 진정 주님께서 머무실 집이어야 한다는 거겠지요.
저는 이런 묵상을 하면서 주님의 집을 재건한 프란치스코를 생각했습니다.
먼저 프란치스코처럼 가슴의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 성당을 세웠을 뿐 아니라 성당에 대한 신앙심이 대단했습니다.
유언에서는 주님께서 성당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고 몸소 고백하고,
전기는 성당에 대한 사랑으로 늘 빗자루를 가지고 다니며 청소했다고 전하지요.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 첼라노는 그의 기도에 대해 이것도 전합니다.
“그는 가슴에 성전(聖殿)을 만들었다.
그는 몰아(沒我)에 들어갔기에 거기에는 흐느낌이나 한숨이 없었다.”
저는 오늘 이 축일에 이 가슴에 성전을 세우는 것을 먼저 묵상했습니다.
밖의 성당도 중요하지만 안의 성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이 중요성을 더 느낍니다.
굳이 어디를 찾아갈 필요도 없고 수시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화살기도처럼 시간과 공간의 구애받음 없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니
얼마나 효과적이고 얼마나 탁월하게 전 삶을 성사로 만드는 것입니까?
두 번째는 작은 성당을 세우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 성당에 가 보신 분은 알고 계시는 바이지만
프란치스코가 다시 짓고 너무도 사랑하여 그곳을 작은형제들의 못자리로
삼은 성당은 아주 작은 성당인데 후대에 그 위에 꽤 큰 성당을 지었기에
현재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큰 성당 안에 작은 성당이 있는 구조입니다.
저도 큰 성당 속의 작은 성당을 지을 수만 있어도 큰 만족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주님의 대리자들이 있는 라테라노 대성당 안에
우리는 작은 성전을 세워 거기서 작은 교회를 이루면 충분하고도 좋습니다.
큰 성당은 신자들이 본당신부를 따로 한번 보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작은 성당은 목자와 신자들이 자주 그리고 가까이 만나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저는 작지만 큰 교회를 세우고도 싶습니다.
건물과 인원 면에서는 작지만 품이 큰 교회입니다.
진정 큰 성당은 건물이 크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성당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이 큰 성당이고,
피부색과 언어가 달라도 다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이 큰 성당입니다.
얼마 전 새로 되신 레오 교황께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씀들을 하셨지요.
"안전한 항구를 바라보는 저 배들과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해안을 찾는 그 눈들이 냉담함과 차별의 낙인을 마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선교란 단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며 환대와 연민, 연대 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며 교회는 팔과 마음을 열어 이들을
형제로 맞이하고 위로와 희망의 현존이 되어야 한다."
이는 트럼프의 배타적이고 극우적인 반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성 소수자나 이민자들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국내 극우적 세력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며 또 우리 교회는 이들과 달라야 할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해 예언적인 자세와 적극적 입장표명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선교란 꼭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와 환대와 연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라테란 대성당은 큰 성당이고,
우리는 개인이나 공동체로서 작지만 큰 성당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