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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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교회의 교사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
그러자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드시며, 이 명령이 교사의 직책을 받아 교회에서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각별히 더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밝히셨지요.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단순하고 명백한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뜻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것이 사도의 직무, 곧 교사의 직무로 불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유용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자께서는 이해력 깊고 믿음이 착실한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교의를 가르쳐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 영광을 알아보게 된 신자들 위에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아무 때나가 아니라 적절한 때에 그렇게 할것입 니다. 다시 말해, 각 사람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히 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우리도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어머니, 곧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아기 하느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풍성히 낳기만 한다면,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일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슬픔이 자리 잡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어머니”가 되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은 아이를 임신하는 중이고, 분만기에 임박해 있을 따름이다. 신적인 기쁨이 여러분 안에서 태어날 때 비로소 그 아이는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 쪽에서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아이가 이미 태어났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한 대로, 은총 가운데 최고의 은총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490)


<금주간 성서읽기> 2코린 1-7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루터의 경력: 마르틴은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의 소농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한스 루데르가 광부로서 새로운 생계의 기초를 세운 만스펠트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중세 후기 민중 신심의 분위기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마녀 망상과 마귀 신앙이 다른 거칠고 천한 미신과 더불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그것들은 철저하게 교회와 결부되어 있었다. 교회가 민중 안에서 민중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던 것처럼,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 교회와 더불어 생활하고 있었다.
마르틴의 교육 과정도 완전히 교희생활 속에 피묻혀 있었다. 즉. 초등학교를 만스펠트에서 (1469∼1495), 라틴어 학교를 막데부르크에서(1496∼1497) - 여기서 그는 공주생활 형제회의 회원들과 같이 지내며 그들로부터 “데보시오모데르나”의 정신을 배웠다 - 이어 아이제나흐에서(1498∼1501) – 여기서 특히 브라운 보좌신부와 참으로 사제적인 친구가 되었다 -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1501년에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거기서 1505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철학의 기초 과정을 마쳤다.
에르푸르트는 그의 신학의 방향을 정하는 데 매우 큰 의의가 있었다. 그곳에서 가르치던 철학과 신학에서의 오컴주의적 • 유명론적인 “새로운 방법”은, 젊고 개방적인 인간인 그를 신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인 긴장 영역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는 신의 의지의 위대함과 절대성 - 그 앞에서 가련한 인간은 무(無) 속으로 침몰한다 - 을 체험하였고 모든 것을 신의 뜻과 판단에서 이해하는 것을 배웠다. 죄와 은총, 선과 악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신에게 달려 있다. 신이 인간을 은총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착해지고, 신이 인간을 노여움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은 악하다. 신은 원하면 죄인도 자비롭게 간주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의화되고, 따라서 “의인”이 된다. 확실히 그는 여전히 죄인으로 남지만 신은 그를 의화된 것으로 간주한다(의인인 동시에 죄인) . 신은 은총을 부여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자유이고, 아니 자의적이다. 인간은 그것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신이 그에게 자비롭기를 바라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무조건의 헌신으로 신에게로 향해야 한다. 성사도, 구원의 시설로서의 교회도 인간을 도울 수 없다. 오직 인간 자신의 주체적인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