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에서 에페소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냐는 바오로의 물음에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성령 강림 대축일을 코앞에 두고 있는 우리이니
우리도 성령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한 사람은 아닌가?
이런 성찰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이 있다는 말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마라!’라고
하며 일소에 부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혹시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신자들 가운데 심지어 성직자 가운데도
천사나 악마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체험이 없기에 그런 얘기는 아예 입 밖에 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적지 아니 있는데 성령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월적 감수성이랄까 영적 감수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적인 존재는 종종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성과 경험으로 압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경험한 사람은 이성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런데 호랑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고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경험한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그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호랑이가 진짜 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것이고,
경험했다는 사람을 신뢰하면 그 사람의 말도 믿을 겁니다.
옛날에 개똥 철학자인 군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진주에 있는 저를 서울서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외계인이 있는지 먼저 개신교 목사가 된 군대 친구를 찾아가 물었는데
그 개신교 목사는 성서에 그런 얘기가 없으니 없다는 답을 듣고는
천주교 신부는 뭐라고 답하는지 듣고 싶어서 진주라 천 리 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을 하고는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존재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니 있을 수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이성적으로 신적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을
그저 상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초월적 또는 영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작은 머리와 경험에 하느님을 가둘 수는 없는 것이고,
나의 작은 머리와 경험을 가지고 초월적 존재가 있다 또는 없다 단언할 수 없지요.
그러나 내 작은 방의 작은 창을 열 듯이
내 작은 머리와 경험을 하느님께 열면 초월 세계와 존재가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성령 강림 대축일을 코앞에 둔 우리,
신적 가능성에 나의 작은 머리와 경험을 열고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빌며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