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 전서에서 사도 바울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이고, 이 활동의 목표는 공동선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로는 이 구절에 이어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계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는 교황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나, 추기경 및 주교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나, 높은 학력과 경제적 재력을 갖고 있지 못한 평범한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나, 모두 같은 성령이고 하나의 성령이라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면 성령이 각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공동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떠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20세기의 가톨릭 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1904-1984)는 성령은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태초에 이 지상에 인류가 출현한 때부터 종말까지 모든 인류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런 의미에서 라너는 인류의 역사는 곧 구원의 역사임을 형이상학적, 신학적으로 논증한다. 명쾌하고도 감동적이다.
성령께서는 전 인류를 자유와 해방과 구원에로 이끄시고, 따라서 구원의 역사는 곧 자유와 해방의 역사이다. 근대 이후, 대다수 민중은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 바, 이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민중들을 통해서 그리고 민중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役事)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 전서에서 말씀하시는 공동선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특히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민중들을 자유와 민주에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교황과 추기경, 주교, 성직자들로 구성되는 교계 제도가 정치적인 권력 및 부와 결탁되면서 기득권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민중을 자유와 민주로 이끌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들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종교 개혁이나 프랑스 혁명 등 여러 자유에로의 혁명을 통해 민중을 민주와 해방에로 인도하셨다.
가엾은 민중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그들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의 표지는 최근 수많은 국민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및 영결식에서도 볼 수 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것일까? 왜 온 국민이 수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와 영결식 및 노제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는 것일까? 이 슬픔과 감동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동안 여기 저기 게재된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국민적 슬픔과 추모는, 한편으로는, 서민적이었던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가슴 아픈 통곡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이 간절히 바랐던 기대와는 달리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이 “바보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들을 평가 절하하고 그동안 발전시켜 놓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뿐만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공권력에 의지하여 “가진 자들” 중심으로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오만하게 휘두르는 “답답하도록 막혀 있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요, 저항이며, 비판이었다. 이 국민적 분노와 저항과 비판을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그 뒷면에는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정당하고 올바르게 사용할 뿐만 아니라, 부를 정의롭게 분배하여 서민들은 물론 모든 국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의로운 경제 구조를 정착시키고, 국민들이 기본권으로 갖고 있는 자유를 존중하라는, 근원적으로 정의와 자유에 대한 국민적 갈망이 숨겨져 있다. 이 자유와 정의가 곧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 전서에서 말씀하시는 “공동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수많은 인파가 드러내 보여주는 이 <공동선>을 알아보는 것이 곧 이 시대의 징표에 대한 인식이요, 민중 안에 살아 움직이시는 성령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짚어보아야 할 제1차적인 신학적 반성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 또한 눈물을 흘리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은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에게로도 퍼져 나갔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놀라운 인파>를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가슴이 뭉클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 눈물 어린 감동의 신학적 정체는 무엇일까?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 감동은 본질적으로 의로움과 자유를 갈망하는 <약하고 가엾은 국민들>의 공동선, 즉 민중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감동이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추모식을 바라보는 가운데 일어났던 <가슴 뭉클함>과 <눈물 어린 감동>은 그 자체로 이미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요한 20,22).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식과 영결식을 보면서 <가슴 뭉클함>과 <눈물 어린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1코린 12,6)의 성령 강림을 체험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가엾은 우리 국민들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자유와 구원에로 이끄신다.
그러면 성령이 각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공동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떠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20세기의 가톨릭 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1904-1984)는 성령은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태초에 이 지상에 인류가 출현한 때부터 종말까지 모든 인류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런 의미에서 라너는 인류의 역사는 곧 구원의 역사임을 형이상학적, 신학적으로 논증한다. 명쾌하고도 감동적이다.
성령께서는 전 인류를 자유와 해방과 구원에로 이끄시고, 따라서 구원의 역사는 곧 자유와 해방의 역사이다. 근대 이후, 대다수 민중은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 바, 이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민중들을 통해서 그리고 민중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役事)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 전서에서 말씀하시는 공동선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특히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민중들을 자유와 민주에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교황과 추기경, 주교, 성직자들로 구성되는 교계 제도가 정치적인 권력 및 부와 결탁되면서 기득권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민중을 자유와 민주로 이끌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들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종교 개혁이나 프랑스 혁명 등 여러 자유에로의 혁명을 통해 민중을 민주와 해방에로 인도하셨다.
가엾은 민중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그들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의 표지는 최근 수많은 국민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및 영결식에서도 볼 수 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것일까? 왜 온 국민이 수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와 영결식 및 노제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는 것일까? 이 슬픔과 감동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동안 여기 저기 게재된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국민적 슬픔과 추모는, 한편으로는, 서민적이었던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가슴 아픈 통곡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이 간절히 바랐던 기대와는 달리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이 “바보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들을 평가 절하하고 그동안 발전시켜 놓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뿐만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공권력에 의지하여 “가진 자들” 중심으로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오만하게 휘두르는 “답답하도록 막혀 있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요, 저항이며, 비판이었다. 이 국민적 분노와 저항과 비판을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그 뒷면에는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정당하고 올바르게 사용할 뿐만 아니라, 부를 정의롭게 분배하여 서민들은 물론 모든 국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의로운 경제 구조를 정착시키고, 국민들이 기본권으로 갖고 있는 자유를 존중하라는, 근원적으로 정의와 자유에 대한 국민적 갈망이 숨겨져 있다. 이 자유와 정의가 곧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 전서에서 말씀하시는 “공동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수많은 인파가 드러내 보여주는 이 <공동선>을 알아보는 것이 곧 이 시대의 징표에 대한 인식이요, 민중 안에 살아 움직이시는 성령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짚어보아야 할 제1차적인 신학적 반성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 또한 눈물을 흘리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은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에게로도 퍼져 나갔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놀라운 인파>를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가슴이 뭉클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 눈물 어린 감동의 신학적 정체는 무엇일까?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 감동은 본질적으로 의로움과 자유를 갈망하는 <약하고 가엾은 국민들>의 공동선, 즉 민중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감동이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추모식을 바라보는 가운데 일어났던 <가슴 뭉클함>과 <눈물 어린 감동>은 그 자체로 이미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요한 20,22).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식과 영결식을 보면서 <가슴 뭉클함>과 <눈물 어린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1코린 12,6)의 성령 강림을 체험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가엾은 우리 국민들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자유와 구원에로 이끄신다.
혹 카톨릭과 개신교, 불교를 아우라는 해방철학의 공동선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교계제도에 대한 부정을 하신다면, 교회내에서 민주주의 하시자는 말씀이네요...
교황의 특권 타파, 밑에서 시작하는 탈 권위주의, 사제와 평신도의 구별을 없애버리고, 지역 교회별로 민주주의 하자는 그런 말씀 아니신가요?
신부님의 생각을 몰라서 여쭙습니다. 밝혀 주십시요.
그러나 저는 "정치적"이지 않은 저의 강론을 "정치적"으로 이해하시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안에 들어 있는 "정치적 차원"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그렇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의미는 당연하고, 사회적 문화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대단히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전 생애 자체가 정치적 의미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대 헤로데는 세 살 아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게 했습니다. 새로운 임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권력이 위협 받을까 몹시 두려웠던 거지요. 헤로데의 어린아이 살해 사건을 두고 우리는 정치적 의미를 배제한 채 이 성서 사건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사형되셨습니다. 이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에는 그당시 유대인 정치가 헤로대는 물론이고 대제관들도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 보주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되신 거지요. 그 보수주의 핵심에 로마인 정치가 빌라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일 신앙을 고백할 때 이 불행한 정치가 빌라도를 우리 입술에 올려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 및 유대 정치가들과 분리시킬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형되어 묻히신 다음 빌라도는 대제관들과 바리사이들의 요청으로 군인들을 시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군사력이나 정치력으로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도 정치적 맥락과 뗄 수가 없지요.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자체가 정치적 배경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를 신앙으로부터 배제시킬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미사 중에 바치는 신경에서 "빌라도 통치 아래서"를 지워버릴 수 없고, 복음서에 나오는 정치가들의 이름과 사건들을 삭제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신학을 공부한 사제로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신다면, 2천년 전 그리스도께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되셨듯이, 오늘날도 역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지 않을까? 사실 오늘날도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고, 이는 가톨릭 국가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희생자들 앞에서 침묵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성인 교황으로 칭송받는 비오 12세의 가장 큰 결함 중의 하나는 나치 치하에서 자행되었던 유태인 학살에 대해 침묵을 지킨 것입니다. 이것이 비오 12세의 시복에 걸림돌이 되어 현 교황님께서도 고민을 하고 계시지요.
간단히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자체가 그 당시 정치적 사건과 불가분리적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정치와 불가분리적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일부 신자들이 원치 않는다고 해서, 또 설사 많은 신자들이 원치 않는다 해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으로부터 정치적 의미를 떼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신앙의 정치적 의미를 설교해야 할 때, 전 신자들이 원치 않는다 해도, 사명감을 갖고 용기 있게 설교해야 합니다. 예언직은 사제직 및 봉사직과 더불어 사제들의 본연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