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1,27-28
짧지만 깊은 복음입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도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는 모진 비방을 들으셨습니다.
그 위태로운 자리에서, 군중 속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저렇게 훌륭한 분을 낳은 어머니는 얼마나 복될까!’
어머니를 칭송함으로써 아들을 높이는,
참으로 정겹고 따뜻한 찬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얼핏 어머니를 물리치시는 듯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이 보면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찬미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참된 행복이 어디서 오는가’를 밝히십니다.
혈육의 인연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성모님은 ‘가장 복되신 분’이십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그린 성모님을 보십시오.
천사의 말씀을 듣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하셨고,
말씀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셨으며,
열 달 동안 ‘말씀’을 태중에 모시고,
서른 해를 그 ‘말씀’ 곁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은 그저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말씀을 가장 잘 듣고 지키신 분’이기에 복되십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우러르는 참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즐겨 말했듯,
마리아께서 마음으로 말씀을 잉태하신 것이
몸으로 잉태하신 것보다 더 복됩니다.
그리고 그 복됨은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지키면, 그 복에 참여합니다.
눈여겨볼 낱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키다’입니다.
듣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듣기만 하고 사는 것은 헛된 감상에 그치고,
지켜 내는 데서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성모님의 삶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는 달랐습니다.
혼인 전 잉태로 파혼의 위기를 겪으셨고,
사랑하는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지키는 행복’은 편안함의 보증이 아니라,
어떤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복입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첫 주간의 완벽한 매듭입니다.
‘성실’이 무엇입니까? 들은 말씀을 ‘지켜 내는 것’입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성모님처럼 부드럽게 “예” 하는 것입니다.
‘절제’가 무엇입니까? 흩어짐 속에서 말씀 하나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될 ‘친절과 선행’은,
바로 이 ‘지킨 말씀’이 이웃에게 흘러넘치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킨 사람의 손은, 반드시 이웃을 향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는가?
나는 겉모습(혈육·직책·경력)으로 복을 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어둠 속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깊은 복을 아는가?
내가 지킨 말씀은 이웃과 창조를 향해 흘러넘치는가?
주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지켜 살게 하소서.
성모님처럼 마음에 새겨 간직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