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조회 수 6 추천 수 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푸른 종이에 쓰는 편지

 

하늘이 이토록 시리게 맑은 날에는

어디론가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구름 한 점 머물지 못하는 허공이

너무 넓고 깨끗한 백지 같아서,

가만히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웅크렸던 말들이 잉크처럼 번져 나온다.

 

바람은 서늘하게 옷깃을 여미게 하고

햇살은 투명하여 숨길 비밀조차 없는데,

유독 이런 날이면

가장 아득한 곳에 두고 온 이름 하나가

지워지지 않는 문장으로 떠오른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흔한 첫 인사가

푸른 하늘 길을 따라 길게 번져간다.

계절이 제 가장 찬란한 살을 비워

바람의 길을 열어두었듯,

나 역시 비워낸 고독의 자리에

당신을 향한 다정한 염려를 채워 넣는다.

 

하늘이 너무 시리게 높아

지나온 계절의 상처조차 투명해지는 날,

바람은 마른 잎사귀의 모서리를 스치며

유리알 같은 침묵을 떨어뜨린다.

 

서늘해진 공기 속에서도

내 가슴 한구석은 아직 식지 않아,

미처 다 비워내지 못한 미련들이

붉은 불씨처럼 조용히 파닥인다.

끝내 다 쥐지 못했던 삶의 무게가

외로운 그림자로 길게 늘어설 때,

 

문득 이 깊은 고독의 한가운데로

아주 맑고 서러운 은총이 내린다.

제 살을 깎아 찬란해진 가을 허공 너머,

아직 뜨거운 내 연약한 심장을

가만히, 깊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머문다.

 

슬픔은 물기가 빠져 더는 얼룩지지 않고

가벼워진 바람 속에서 기도가 된다.

다 식지 않은 채로도

당신의 품에 닿을 수 있음을 알기에,

이 시린 계절의 한복판에 서서

눈물 대신 고요한 감사를

그리운 이들과 나누고 싶다.

 

주소를 적지 않아도

이 맑은 바람이 내 은밀한 기도를 실어

그리운 이의 창가에 가만히 부려놓을 것만 같아,

나는 오늘 하루 종일

파랗게 벼려진 하늘 위에

따스한 안부 한 줄을 꾹꾹 눌러 적는다.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자유나눔 게시판

자유롭게 글을 남겨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푸른 종이에 쓰는 편지 푸른 종이에 쓰는 편지   하늘이 이토록 시리게 맑은 날에는 어디론가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구름 한 점 머물지 못하는 허공이 너무 넓고 깨끗한 백지 같아서... new 이마르첼리노M 2026.09.02 6
1961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가난은 결국 보게 하는 힘입니다. 내 욕망의 안개가 걷히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 new 이마르첼리노M 2026.09.02 24
1960 뮤지컬 <프란치스코> 공연 알림 뮤지컬 공연 안내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올해 프란치스코 파스카 800주년을 맞이하여 저희는... 김레오나르도 2026.09.01 145
1959 가을이 걸어오면 가을이 걸어오면   가을이 걸어오면 하늘은 가장 맑은 빛을 풀어 산과 들의 이마를 짚습니다.   빛이 머문 자리마다 나무는 제 안의 빛깔로 깊어지고 들녘은 익... 이마르첼리노M 2026.08.31 28
1958 안개 속의 아다지오 안개 속의 아다지오   젖은 어둠이 숨죽여 내려앉는 밤 세상은 부드러운 안개 너울을 쓰고 천천히 가장 낮은 음역으로 가라앉는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성이던 ... 이마르첼리노M 2026.08.31 25
1957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오늘 복음 묵상)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오늘 복음 묵상)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 이마르첼리노M 2026.08.30 44
1956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글라라에게 가난은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흠 없는 외모와 젊음과 건강과 화려함... 이마르첼리노M 2026.08.30 40
1955 가장 고독할 때 쓰는 시 가장 고독할 때 쓰는 시   가장 고독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시린 문장을 고릅니다. 창밖의 어둠은 잉크처럼 번져가고, 방 안을 떠도는 것은 식어버린 온기의 ... 이마르첼리노M 2026.08.29 57
1954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은 물건을 가지지 않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은 형제에게 자신의 필요를 말할 수 ... 이마르첼리노M 2026.08.29 47
1953 십자가는 극치의 사랑이며 사랑의 극치다 (2026,8.28 독서묵상) 십자가는 극치의 사랑이며 사랑의 극치다 (2026,8.28 독서묵상)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 이마르첼리노M 2026.08.28 45
1952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글라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라본다는 것은 눈으로 한 형상을 관찰... 이마르첼리노M 2026.08.28 62
1951 복음의 깨어있음에 대한 현실적 진단 복음의 깨어있음에 대한 현실적 진단   복음에서 말하는 “깨어 있음”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마르첼리노M 2026.08.27 92
1950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가난은 팔을 벌리는 일입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가슴 앞에 단단히 포개었던 두 팔을 천천히 펼쳐, 다른 ... 이마르첼리노M 2026.08.27 91
1949 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당신이 그분을 사랑할 때 당신은 정결해지고, 당신이 그분을 만질 때 당신은 더 깨끗해지며, 당신이 그분... 이마르첼리노M 2026.08.26 70
1948 가을밤에 듣는 풀벌레들의 합창   가을밤에 듣는 풀벌레들의 합창   가을밤이 깊어지면 낮 동안 세상을 가득 채우던 말들이 하나둘 잠들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문 안으로 돌아가고, 산등성이 ... 이마르첼리노M 2026.08.25 90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1 Next ›
/ 13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