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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여섯 번째 이야기 마지막

 

형제성은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낳는 모성적 신비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말씀을 받아 몸으로 낳으셨듯, 우리는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낳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형제를 품고 기다리며, 그의 상처가 치유될 공간을 마련하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자라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지 않고 그가 고유한 존재로 태어나도록 몸을 내어주듯, 형제성은 다른 이가 그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줍니다. 내가 원하는 형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안에 심으신 고유한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돕습니다.

 

형제성은 누군가를 내 안에 가두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으로 태어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이러한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가 계속 태어나는 집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의 발을 씻고, 빵을 나누며, 아픈 이를 돌보고, 갈등 속에서도 다시 용서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몸을 얻으셨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도 그렇게 오늘의 포르치운쿨라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들어올 때 평가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아도 되며, 실패했을 때 버려질까 불안해하지 않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지친 형제가 잠시 쉬어 갈 수 있고, 상처 입은 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으며, 젊은 형제가 질문하고 도전해도 안전하고, 나이 든 형제가 약해져도 존엄을 잃지 않으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배제되지 않고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포르치운쿨라의 문은 작은 문이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높은 사람도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위와 공로와 자존심을 그대로 세운 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작아져야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형제성의 문도 그러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이를 통제하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아야 합니다.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를 내려놓고, 나도 사랑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도 완전한 모습으로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각자는 상처와 두려움과 미성숙함을 지니고 옵니다. 공동체는 그런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공장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가 자비 안에서 천천히 치유되는 집입니다.

 

어떤 상처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형제성은 그 시간을 재촉하지 않습니다. 꽃마다 피어나는 때가 다르듯, 사람마다 회복과 성장의 시간이 다릅니다. 늦게 피는 꽃이 오래가듯 한 형제의 더딘 변화 안에도 하느님의 깊은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과정 안에서 일하십니다. 형제의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베푼 인내와 신뢰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씨앗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결과를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선을 행하고 열매는 하느님께 맡깁니다.

 

다시 형제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결국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형제를 소유하지 않는 가난, 내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는 가난,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가난, 도움을 주고받는 가난입니다. 가난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결핍이 아니라 공동체를 건설하는 공간입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 때 비로소 형제가 들어올 수 있고, 내 뜻으로 모든 자리를 채우지 않을 때 성령께서 우리 사이에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형제를 경쟁자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선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이의 은사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잘될 때 함께 기뻐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그가 지녔다는 사실을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형제성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관계입니다. 나의 힘이 형제의 약함을 받치고, 형제의 지혜가 나의 어리석음을 밝혀 주며, 서로의 은사가 공동체 안에서 흐릅니다. 누구도 모든 것을 가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완전하게 창조하신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하도록, 자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충만함을 경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을 기억하며 다시 형제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의 시대의 공동체를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상처와 분열 속에서 그가 살았던 형제성의 정신을 새롭게 육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사람에게 안전한 집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닫힌 문입니까. 누가 식탁의 중심에 앉아 있고, 누가 가장자리에서 말없이 머물고 있습니까. 누구의 목소리는 쉽게 들리고, 누구의 이야기는 반복해서 무시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형제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능력과 지위와 친밀함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까. 건강하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귀하게 여기면서, 아프고 느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는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형제성이 공동체 내부에만 머물러 가난한 이와 상처 입은 세상에는 닫혀 있지 않습니까. 우리끼리는 서로 친밀하지만 낯선 이에게는 차갑고, 자연과 피조물의 신음에는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선종 800주년의 참된 기념은 프란치스코를 형제라고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소외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의 형제성을 강의하는 것보다 공동체 안의 한 형제와 화해하는 일이 더 깊은 기념입니다. 다시 형제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오늘 한 사람을 다르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가 오랫동안 문제라고 여겼던 형제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선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의 허물 뒤에 숨겨진 아픔을 보고, 그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를 즉시 좋아하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에게 필요한 존중을 지키며, 하느님께서 관계를 새롭게 하실 작은 틈을 남겨 두는 것은 가능합니다. 형제성은 그 작은 틈에서 시작됩니다. 문을 완전히 닫지 않는 것, 대화를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 형제의 이름을 기도 안에서 부르는 것, 그의 선을 하나라도 기억하려는 것, 내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대한 틈보다 작은 틈으로 들어오십니다. 닫힌 마음에 생긴 작은 균열 하나를 통하여 자비의 빛이 스며들고,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관계에 작은 온기가 돌아옵니다. 혼자 거룩해지려 하지 말라고, 형제를 떠나 하느님을 찾지 말라고,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관계의 문을 영원히 닫지 말라고, 다른 이가 빛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약한 형제를 공동체의 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식탁으로 부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빵을 나누고, 한 잔을 마시며, 자신이 받은 생명이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식탁입니다.

 

성체성사는 형제성의 가장 깊은 학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에서 생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룹니다. 제대 앞에서 형제라고 고백하면서 일상에서는 서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면서 그 몸의 지체인 형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것은 단지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만이 아닙니다. 내가 이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되겠다는 약속이며,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입니다.

 

성체는 우리를 부서지는 빵으로 만듭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단단해지는 삶이 아니라 다른 이가 살아나도록 자신을 나누는 삶으로 이끕니다. 형제성은 성체적 삶입니다. 내 시간과 능력과 관심을 나누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편안함을 조금씩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서짐은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어준 생명은 사라지지 않고 더 큰 생명으로 흘러갑니다. 사랑으로 나눈 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관계로 태어납니다.

 

우리가 한 형제를 위하여 시간을 내어줄 때, 그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뢰가 됩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때 우리의 침묵은 위로가 되고, 먼저 사과할 때 낮아진 자존심은 화해의 문이 됩니다. 이것이 형제성의 파스카입니다. 나의 왕국이 죽고 우리라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뜻을 조금 내려놓을 때 공동체 안에 더 큰 선이 살아나고, 내가 중심 자리에서 물러날 때 다른 형제의 은사가 꽃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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