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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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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자비는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2

 

용서하는 자비는 흐르도록 나에게 주신 선물

자비는 흘러가도록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샘물이 자기 자신을 위해 솟아오르지 않듯이, 강물이 자기 안에 물을 가두기 위해 흐르지 않듯이, 하느님의 자비 역시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끝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나를 살리고 나를 지나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움켜쥐고 나만의 위로로 간직한다면 자비는 내 안에서 고이기 시작하지만, 받은 사랑을 다시 내어줄 때 자비는 강물이 되고 길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미워하는 동안 나는 미워하는 사람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가 곁에 없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 그와 대화하고, 그가 오래전에 떠났어도 나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용서는 과거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더 이상 과거가 오늘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문을 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작은 파스카입니다. 죽음처럼 굳어 있던 관계와 기억 속에서 생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돌처럼 굳어 있던 마음 어딘가에 아주 작은 틈이 생기며, 그 틈으로 하느님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용서하는 자비와 용서받는 자비가 하나가 됩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하는 순간 나는 내가 용서받은 사람임을 다시 기억하고, 내가 용서받음을 깊이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사람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용서받음은 용서함으로 흘러가고, 용서함은 다시 나를 더욱 깊은 용서받음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이것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 계산할 수 없는 사랑의 순환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만들어 가시는 은총의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라는 말씀은 어쩌면 일흔일곱 번 네가 용서받은 사람임을 기억하여라.”라는 말씀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화가 다시 올라올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나 역시 용서받았습니다. 상처가 다시 아파올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나 역시 기다림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누군가도 나의 부족함을 견디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억지로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고 그 용서할 수 없음까지 하느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주님, 저는 아직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싶어 하는 마음만이라도 제 안에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조차 이미 자비가 흐르기 시작한 작은 틈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만났을 때 일어난 회심도 어쩌면 이러한 자비의 흐름이었습니다. 그가 먼저 위대한 자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그의 닫힌 마음을 열어, 한때 역겨움의 대상이었던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달라진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눈이 달라졌고, 세상이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비의 소유자가 아니라 자비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흘러온 사랑이 그의 가난한 몸과 손과 눈을 지나 한 형제에게로 흘러간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적인 가난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내가 용서했습니다. 내가 사랑했습니다. 내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선행마저 자신의 소유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 제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께 받은 용서가 제 안을 지나간 것이고, 제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었다면 당신께서 저를 오래 기다려 주신 그 기다림이 흘러간 것이며, 제가 누군가의 상처 곁에 머물 수 있었다면 먼저 제 상처 곁을 떠나지 않으셨던 당신의 자비가 제 작은 몸을 빌려 그 사람 곁에 머문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자비의 주인이 아니라 자비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작은 집이며, 사랑의 근원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가는 길이고, 샘이 아니라 샘에서 흘러나온 물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작은 물길입니다. 그래서 내적 가난은 자비를 더욱 맑게 합니다. 내가 자비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을수록 자비는 더 자유롭게 흐르고, 내가 용서했다는 공로를 내려놓을수록 용서는 더욱 순수해지며, 내가 상대보다 낫다는 자리를 내려놓을수록 우리는 비로소 같은 땅 위에서 서로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라면 내일은 용서받는 사람이 될 것이고, 오늘 내가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내 눈물을 닦아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전에 서로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형제는 때로 나에게 자비를 흘려보내는 하느님의 작은 강이 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 강의 한 줄기가 됩니다. 이렇게 자비는 하느님에게서 시작하여 나에게 오고, 나를 지나 형제에게 가며, 형제를 지나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마침내 우리가 모두 하나의 바다처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비란 상처가 없는 사람들의 사랑이 아니라 상처를 가지고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랑입니다. 잘못을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니라 잘못을 분명히 보면서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눈이며,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무책임함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존재를 심판의 마지막 자리에 가두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비는 때로 기다림이고, 때로 침묵이며, 때로 진실한 한마디이고, 때로 거리를 두는 것이며, 때로 다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모습의 중심에는 하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당신의 잘못 하나로 규정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내가 먼저 하느님에게서 받은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나의 가장 부끄러운 순간 하나로 규정하지 않으셨고, 나의 실패 하나를 나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셨으며, 넘어졌던 자리 하나를 내 인생의 마지막 자리로 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다시 길을 열어 주셨고, 다시 시작할 자리를 남겨 두셨으며,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실망했을 때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받은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억지로 넓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이 내 안에서 흐를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힘으로 일흔일곱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 하느님의 자비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아픕니다. 다시 화가 납니다. 다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다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제 마음을 당신의 마음 안에 담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동안 어느 날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애쓰던 내가 어느새 용서받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했던 내가 오히려 그 사람을 통해 나 자신의 가난을 배우고 있었으며, 형제를 살려주려고 내민 손이 사실은 나 자신을 미움에서 건져 올리는 손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을 나누는 경계마저 희미해집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하면서 용서받고, 용서받으면서 용서하며, 서로의 부족함을 통하여 자신의 가난을 배우고, 서로의 기다림을 통하여 하느님의 기다림을 경험하며, 서로에게 다시 시작할 자리를 내어주면서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아침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자비는 그렇게 흐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서 나에게로, 나의 상처 깊은 곳으로,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기억 속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형제에게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까지 조용히 흘러갑니다. 때로는 아주 느리게 흐르고, 때로는 돌에 부딪혀 멈춘 듯 보이며, 때로는 땅속 깊이 숨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비는 끝내 자신의 길을 찾아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비를 소유하지 않겠습니다. 자비를 붙잡지 않겠습니다. 내가 받은 용서를 내 공로로 만들지 않고, 내가 베푼 용서를 자랑하지 않으며, 다만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지나갈 수 있도록 조금 비워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용서받는 자비로 나를 살리시고, 용서하는 자비로 형제를 살리시며, 그 두 자비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의 관계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 당신의 자비가 제 안에서 멈추지 않게 하소서. 제가 받은 사랑이 저에게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제가 받은 기다림이 또 다른 기다림이 되게 하시며, 제가 받은 용서가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자리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좁아져 자비의 물길을 막을 때마다 저를 다시 가난하게 하시고, 제가 옳다는 생각으로 형제를 판단할 때마다 저 역시 용서받아 살아가는 사람임을 기억하게 하시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순간에는 용서하는 척하지 않고 그 가난한 마음 그대로 당신 앞에 서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제가 알게 하소서. 자비는 내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 사이를 흘러가시는 방식이며, 용서는 내가 이루어 내는 위대한 행위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막힌 관계 속에서 다시 길을 내는 사건이고, 일흔일곱 번의 용서는 내가 일흔일곱 번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 다시 당신의 자비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그러므로 오늘도 저는 두 손을 비웁니다. 한 손으로는 용서받는 자비를 받아들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용서하는 자비를 흘려보내며, 어느 것이 받는 손이고 어느 것이 주는 손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가난해져, 다만 당신의 자비가 지나가는 작은 길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자비는 흘러가도록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용서받는 자비는 나를 살리고, 용서하는 자비는 형제를 살리며, 서로 주고받는 자비는 우리 사이에 죽어가던 관계를 다시 살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자비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당신이 계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제가 자비의 주인이 아니라 자비가 흘러가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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