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새 계명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29절) 예수님의 대답은 유다인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신명기의 기도문(‘쉐마’)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며, 그분이 내 삶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사랑,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30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이나 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내면의 가장 깊은 중심과 의지, 목숨은 나의 생명과 존재 전체, 정신은 나의 지성과 생각, 힘은 나의 육체적 능력과 구체적인 행동즉, 나의 모든 역량과 존재 전체를 다해 하느님을 향하는 전인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31절) 예수님께서는 질문자가 묻지 않은 '둘째 계명'까지 함께 묶어서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내 이웃(특히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내 몸처럼 아끼고 돌보는 행동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강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길은 하나의 길에서 만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지 않고 들으라는 초대로 시작됩니다. 사랑은 말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형제의 목소리를 듣고, 피조물의 신음까지 듣는 사람만이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먼저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나병환자의 침묵을 들었으며, 새들의 노래와 바람의 숨결 속에서 창조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가 되었고, 교리가 아니라 삶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무엇인가를 더 많이 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열어 놓으라는 초대입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내 감정뿐 아니라 상처와 두려움까지도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정신을 다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복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힘을 다한다는 것은 사랑을 생각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렇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먼저 내적 가난을 배웁니다. 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은 선물로 아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집착을 내려놓고, 내 공로를 내세우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타인보다 앞서고 싶어 하는 비교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비로소 들을 수 있습니다. 가득 찬 그릇에는 물이 들어갈 수 없지만, 비어 있는 그릇에는 샘물이 흘러 들어오듯이, 비워진 영혼 안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이웃 사랑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께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하나로 묶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강의 원천이고, 이웃 사랑은 그 강물이 흘러가는 길입니다. 원천만 있고 흐름이 없다면 강은 썩어 버리고, 흐름만 있고 원천이 없다면 강은 말라 버립니다.
기도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반대로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의 근원을 잊어버린다면 사랑은 결국 지치고 맙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숨결이고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형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노인의 느린 걸음을 기다려 주는 순간, 아픈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순간, 실수한 사람을 비난보다 이해로 품어 주는 순간, 가족의 반복되는 부족함을 인내로 감싸 주는 순간, 그곳에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프란치스칸 겸손은 여기에서 더욱 빛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존재할 공간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순간에 들어 주는 것, 붙잡고 싶은 순간에 놓아주는 것, 지배하고 싶은 순간에 허용하는 것, 인정받고 싶은 순간에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 안에서 사랑은 살아납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아의 집착이 죽어야 형제성이 피어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두 개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의 삶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물며 사람을 사랑하는 삶,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남으로써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작은 이가 계십니다. 굶주린 사람, 외로운 사람, 상처 입은 사람, 나와 다른 사람, 때로는 내 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도. 그들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순간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피조물과 모든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그 사랑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며, 성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복음의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