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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적 요소와 프란치스칸 신학의 영적인 통찰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

존재의 본질은 관계이며, 사랑은 흐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는 삼위일체라는 신비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이면서도 한 분이신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는 단순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적 공식이 아니라,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가장 깊은 대답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은 하느님이 고립된 절대 권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내어주고 받아들이시는 사랑의 관계라는 데 있습니다. 성부는 자신을 온전히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자신을 온전히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둘 사이를 흐르는 살아 있는 사랑과 기쁨의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정지된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이며,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사랑의 동사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위격은 철저히 타자를 향해 열려 있으며, 그 내어줌 속에서 오히려 완전한 충만에 이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입니다.

 

하나보다 더 완전한 의 신비

삼위일체는 단순히 숫자 3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완전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홀로 있는 존재는 선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 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셋이 될 때 사랑은 비로소 닫힌 관계를 넘어 기쁨과 나눔과 환대의 공동체가 됩니다. 부모가 함께 아이를 바라보며 기뻐하듯, 사랑은 함께 기뻐할 때 가장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성령은 단순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가 함께 나누는 사랑의 기쁨이며 생명의 넘쳐흐름입니다. 삼위일체는 결국 존재의 완성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삼위일체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 역시 관계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함께 기뻐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참된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은 단지 머리로 믿는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관계,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삶, 내 것을 움켜쥐기보다 흘려보내는 태도, 경쟁보다 공동선을 향하는 마음, 지배보다 환대와 공존을 선택하는 삶, 이 모든 것이 삼위일체적 삶입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의 핵심 통찰,
작음과 가난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아름다움 프란치스칸 영성은 삼위일체 신앙을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게 삶으로 번역해 낸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권력과 위엄으로만 보지 않고,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시는 사랑으로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의 핵심은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작아지신다는 데 있습니다.

 

내려감의 신비, 하느님의 겸손,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힘으로 군림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높아짐보다 낮아짐, ‘소유보다 비움, ‘지배보다 형제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만물을 형제자매로 바라보는 시선,
프란치스칸 신학의 또 하나의 핵심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보는 것입니다. 태양은 해 형제’, 물은 물 누이’, 바람은 바람 형제’, 불은 불 형제가 됩니다.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같은 사랑의 근원에서 왔기에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자연을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형제로 바라봅니다. 이 시선 안에서는 생태적 감수성과 영적 감수성이 하나가 됩니다.

 

작음의 영성,
선의 흐름을 허용하는 삶, 프란치스칸 신학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삶보다 하느님의 선이 흘러가도록 자신을 비우는 삶을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려 하지 않고, 좋은 일이 내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으며,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조용한 도구가 되는 것. 이것이 프란치스칸적 가난의 핵심입니다.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우울하거나 비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볍고 기쁜 자유입니다. 비워진 자리로 하느님의 사랑과 타인의 고통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와 프란치스칸 영성의 만남,
삼위일체 신학과 프란치스칸 영성은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보여주고, 프란치스칸 영성은 그 존재 방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삼위일체가 서로를 내어주는 사랑의 흐름이라면, 프란치스칸 영성은 그 흐름을 막지 않고 삶 안에서 통과시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성은 자기 완성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사랑이 흐르게 하는 허용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
오늘의 세계는 끊임없이 더 높아지라고 말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경쟁하고, 더 중심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와 프란치스칸 영성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길, 지배가 아니라 상호 내어줌의 길, 소유보다 나눔의 길, 경쟁보다 형제애의 길, 힘보다 부드러움의 길, 자기확장보다 자기비움의 길,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지고, 세상은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는 멀리 있는 천상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관계 안에서 사랑이 흐를 때 이미 시작되는 살아 있는 현실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와 우리 삶의 방향 전환

서로를 향해 흐르는 하느님

삼위일체는 설명하기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홀로 완전하신 절대 권력자로 상상해 왔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스스로 완결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이며 기쁨 속에 순환하시는 영원한 관계의 신비이십니다. 성부는 자신을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자신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둘 사이를 흐르는 사랑의 숨결처럼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멈춰 있는 명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사랑하시는 분, 내어주시는 분, 흐르시는 분, 머무르시는 분입니다. 마치 산골짜기의 샘물이 스스로를 위해 머물지 않고 흘러넘쳐 강을 이루듯, 삼위일체의 생명은 끊임없는 자기 비움과 받아들임 속에서 더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흔히 강함을 독립과 자기 충족에서 찾습니다. 남에게 기대지 않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 아무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홀로 완결된 자아가 아니라 철저히 서로에게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 없이 아버지일 수 없고아들은 아버지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성령은 그 둘 사이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분들의 완전함은 독립에 있지 않고 상호 내재에 있습니다. 서로 안에 머물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자기를 내어주어 타자가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약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점점 더 강해지는 길이라기보다 점점 더 열리는 길입니다. 혼자 버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서로 기대는 사람이 되는 것,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벽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문을 여는 것, 움켜쥐는 손이 아니라 내어주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수많은 고통은 사실 사랑의 흐름이 막힐 때 시작됩니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았기에 우리는 자신을 숨깁니다. 거절당할까 두려워 마음을 닫습니다. 빼앗길까 불안하여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통제하지 못하면 무너질 것 같아 사람과 상황을 움켜쥡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에게 반대 방향을 가르칩니다. 비워야 채워지고, 내어주어야 흐르며, 열어야 사랑이 들어온다는 것을.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리듬처럼 삶도 사랑의 순환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내어줌이 멈추면 영혼은 고여 버립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듯 사랑도 흐르지 않으면 생명을 잃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교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는 군주가 아니라 그 사랑의 순환 안으로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의 웃음을 함께 바라보며 더 큰 기쁨을 나누듯, 하느님은 당신들의 기쁨 속에 우리까지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흐름 안으로 불려 들어간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완성은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 안에 머물고, 서로의 짐을 져 주며, 타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누군가의 아픔 안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삶을 벽이 아니라 다리로 내어놓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를 믿는 삶입니다.

 

삼위일체는 멀리 하늘 위의 신비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식탁에서, 공동체의 눈물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순간에서, 자연의 숨결과 피조물의 노래 안에서 계속 드러나는 살아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흐름 안으로 자신을 허용한 사람은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행복은 홀로 완벽해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를 살리는 사랑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데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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