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
어제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낸 우리는 다음 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게 되는데
그러므로 이번 주간 내내 성령 강림을 준비하며 한 주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사도행전에서 에페소 신자는 성령을 받았냐는 물음에
성령은 받지 않았지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페소 신자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부활 제6주일 독서로 읽었던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 에페소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 뿐이고 성령과 성령의 세례는 더더욱 받지 않았지요.
우리도 이들과 같은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요한의 세례든 예수님의 세례든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 못하고 그 세례도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꼭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을 받고 싶은 열망이 있기는 한가요?
이 지점에서 사도행전이 말하는 그저 세례를 받은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의 차이를 우리가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성사론도 세례 성사는 입문성사라고 하지요.
그리고 얼마 지난 다음에 견진성사를 받고요.
이 견진성사에 관해 교회법은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견진성사로 영세자들은 그리스도교 입문의 여정에서 진보하여 성령의 은혜로
충만케 되고 교회에 더욱 완전 결속되어 그리스도 신앙의 증인과 전파자가 된다고.
법적으로는 이렇게 얘기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의 은사를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은사를 충만히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관건은
살기에 앞서 받는 것이요 은사를 충만히 살기 위해서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죄와 계명 가운데 살던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살게 되고,
죄짓지 않고 사는 것에 급급하던 사람이 사랑을 충만히 살게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저는 오늘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늘 성령에 감싸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화하면 우리는 우리를 열기만 하면 되고,
우리의 오장육부와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안으로 밀고 들어오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한 채 살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걸 알아채고 깨어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곧 우리 정신을 차림으로써 성령에 둔감하지 않고 민감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도록 나를 열고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는 것이 성령을 모시는 시작임을 알고,
정신을 차리고 사는 것이 바로 영성 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