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징은 태도적 변화의 서곡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성경에서 '회개'와 '부활'이라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를 관통합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할 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기적보다 더 본질적인 변화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요나의 표징이 실질적인 현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니네베'라는 현장의 재발견
요나가 가기 싫어했던 니네베는 당시 이스라엘의 원수이자 죄악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니네베는 어디일까요? 외면하고 싶은 소외지,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갈등의 현장, (정치적 대립, 혐오의 대상 등)으로 먼저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의 시선으로, "너희는 망한다"는 저주가 아니라, "돌아서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곳이 요나의 현장입니다.
2. '물고기 배 속'과 같은 성찰의 시간
요나는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이라는 어둠과 고립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는 철저한 자기 비움과 성찰을 의미합니다. 멈춤과 비움으로 현존 아래 머물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 객관화가 성찰입니다. 속도와 효율만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침묵의 시간'이 실질적인 표징의 시작입니다. 부활의 전제 조건은 언제나 죽음 같은 고립을 통과한 뒤에야 새로운 생명(부활)의 표징이 나타납니다.
3. '재 위에 앉는' 진정한 회개
니네베 왕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하며 회개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형식적인 반성이 아닌 삶의 방향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 변화는 먼저 생태적·사회적 회개로 드러납니다. 기후 위기나 불평등 등 현대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책임을 느끼고 행동을 바꾸는 것이 이 시대의 '자루옷'을 입는 행위일 것입니다. 또한 삶으로 증명하는 표징이 태도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기적적인 현상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나의 삶 자체가 타인에게 "하느님이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요나의 표징이 오늘날 실현되려면, "나의 고정관념이 죽고(물고기 배 속), 내가 싫어하는 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니네베 행), 공동체가 함께 삶의 방식을 바꾸는(회개)"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마태오 12,41)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악과 요나의 표징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권고 2의 핵심 사상, 곧 “선과 덕은 모두 주님의 것이며, 이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악입니다”라는 가르침을 토대로, 요나의 표징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관점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특히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붙드는 것”이 왜 영적 악의 근원으로 규정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영적 권고 2의 핵심 명제
모든 선은 하느님께 속합니다. 인간은 선의 주인이 아니라 수혜자입니다. 선을 자기 공로로 돌리는 순간, 인간은 하느님의 것을 가로채는 영적 도둑이 됩니다. 그 근원에는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붙드는 태도”가 자리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악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존재론적 왜곡입니다. 인간이 자기 의지를 절대화하는 순간, 그는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나 창조주의 자리를 점유하려 합니다.
요나의 표징과 자기 의지의 문제
요나의 불순종은 단순한 도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의 고수입니다. 요나는 니네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신의 정의감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해석을 우선시했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근본 문제는 외적 불순종이 아니라 내적 소유욕입니다. 그는 자기 판단과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물고기 배 속의 영적 의미
물고기 배 속은 징벌의 장소가 아니라 해체의 장소입니다. 외적 통제의 상실은 자기 의지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고립은 자기 변명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어둠은 내면의 진실과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이 과정은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가난’의 핵심과 연결됩니다. 가난은 물질의 포기가 아니라 자기 소유권의 포기입니다. 특히 자기 의지에 대한 소유권의 포기가 핵심입니다.
자기 의지의 심리적 구조
자기 의지를 붙드는 행위는 다음과 같은 내적 동기를 지닙니다. 상황을 예측 가능하게 유지하려는 본능이 통제로 드러난 것이며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받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또한 자기 의지를 내려놓을 경우 정체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이 구조를 직면하지 않는 한, 순명은 외적 복종에 머물 뿐입니다.
프란치스칸적 전환
프란치스코는 자기 의지의 포기를 소극적 체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의 봉헌은 자유의 시작입니다. 순명은 자율성의 상실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자기 내어줌입니다. 참된 가난은 자기 자신조차 소유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전환은 요나가 니네베로 향하는 길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지점입니다. 그는 순명했으나 완전히 비워지지는 못했습니다.
공동체적 관계에서
수도회 공동체 안에서 자기 의지는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공동체를 위한 결정”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태도입니다. 전통이나 효율을 이유로 타인의 의견을 배제하는 행위입니다. 형제의 한계를 인내하지 못하는 조급함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겉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이나, 내면에서는 자기 의지의 절대화일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권고 2는 인간의 악을 행위 중심이 아니라 의지 중심으로 규정합니다.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붙드는 태도는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나는 영적 왜곡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기적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그 전환은 다음을 요구합니다. 자기 판단의 포기이며 자기 의지의 봉헌이고 자비 앞에서의 자기 비움입니다. 자기 의지를 하느님께 내어드릴 때, 철저하게 도구적 존재가 되어 하느님의 은총을 훔치는 도둑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흐르게 하는 협력자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