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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굴복과 고통의 변형 (내면의 보물을 찾는 여정)

 

인간의 에고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며, 심지어 굴복하는 척하면서도 무의식 속으로 숨어 '거짓 자아'를 내세웁니다. 진정한 '빈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영혼은 자유를 포기할 만큼의 더 큰 가치(보물)를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다시 통제권을 쥐려는 원래의 자리로 회귀하게 됩니다.

 

영적 여정은 언제나 내가 옳다는 확신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기사(騎士)의 꿈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병상 위에서 그가 만난 것은 실패가 아니라 무력함이었습니다. 에고는 무력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굴복하는 척하면서도 다른 형태의 우월감으로 변장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한 척하면서 인정받고 싶어 하고, 희생하는 척하면서 통제권을 쥐고 싶어 합니다. 참된 빈자리는 내가 없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중심이 아닌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원래의 자리, 통제와 자기보호의 성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안의 억압된 자아는 우리가 통과 해야 할 영혼의 구덩이입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부정하고, 미워하며, 무서워하는 억압된 부분들영혼의 구덩이로 이해됩니다. 이 소외된 부분들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영혼의 빈 공간이자 상처입니다. 우리가 통과해야 할 길을 보여주신 십자가의 예수는 이 고통의 구덩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직접 통과하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우리 안의 억눌린 부분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밭에 숨겨진 보물을 말씀하시지만, 그 밭은 돌과 가시, 묵은 흙이 섞여 있는 땅입니다. 우리가 부정하고 싶어 하는 감정들, 질투, 두려움, 분노, 열등감. 그것이 바로 영혼의 구덩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구덩이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통과하셨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고통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통과합니다.

 

일상이라는 밭에서 발견하는 보물, 그 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내면의 밭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바로 밭을 일구는 행위입니다. 영의 활동에 대한 굴복은 나의 선택과 결단과 책임을 지려는 모습으로 현재가 됩니다. 내 의지가 아닌 주님의 영이 흐르게 할 때, 비로소 감추어져 있던 보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아시시의 작은 골목과 누더기 수도복처럼, 우리의 일상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보물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공동체에서 오해받는 순간, 말없이 섬겨도 인정받지 못하는 날, 관계 안에서 무력해지는 저녁, 그 자리가 밭입니다. 밭을 일군다는 것은 상대를 바꾸려 애쓰기보다 내 반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영의 활동에 대한 굴복은 패배가 아니라 통로가 되는 일입니다.

 

고통의 의미와 영성은 변형인가 전달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오만과 무지를 무력화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시작됩니다. 위대한 영성은 고통을 어떻게 없애느냐가 아니라, '그 고통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고통과 아픔을 영적으로 변형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그 아픔을 타인에게 투사하거나 전가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영혼은 논리적인 '대답'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를 갈구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찾을 때, 인간은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고통은 반드시 흐릅니다. 문제는 어디로 흐르게 하느냐입니다. 변형되지 못한 고통은 비난이 됩니다. 이해받지 못한 상처는 통제가 됩니다. 억눌린 분노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위장합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 머문 고통은 연민, 즉 측은함으로 변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썩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일입니다. 고통의 변형은 아픔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아픔을 타자에게 전가하지 않는 선택입니다.

 

관계의 심연에서 흐르는 선,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현재입니다. 일상이라는 밭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라는 고랑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랑 사이를 걸으며 내 방식대로 사랑하고, 내 의지대로 이해받기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의 부드러운 통제로 상대의 영혼을 쥐려 합니다. 그러나 관계의 필연적인 고통은 그 통제가 부서지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오만이 무력해지고, 나의 무지가 발가벗겨져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에고는 비명을 지르며 상처받지 않으려 다시금 견고한 성을 쌓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꽉 막힌 절망의 문 앞에서, 영혼은 비로소 굴복의 낮은 자세를 배웁니다.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텅 빈 자리를 마련할 때, 그 빈 구덩이를 채우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의 영입니다.

 

관계 안에 선()이 흐르게 하는 분은 내가 아니라 그분의 영이심을 지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를 통제하는 손길을 멈추고 정확하게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상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투사하지 않는 명료함이며, 내 안의 억눌린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는 넉넉함입니다. 그렇게 흐르는 선의 물줄기가 바로 지금 여기 임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고 내 안에서 기도의 제물로 변형시킬 때, 밭 아래 깊이 묻혀 있던 보물은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음 너머의 보상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그 의미를 발견하며 타자의 영혼 앞에 무릎 꿇는 바로 그 순간에 흐르는 거룩한 생명력입니다. 우리가 의미를 찾아 살기로 작정할 때, 그 고통은 더 이상 파멸의 흉기가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심장으로 인도하는 가장 깊은 길목이 됩니다. 에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그 성벽을 허물고 고통의 한복판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할 때 일어납니다. 고통 그 자체가 고통받는 이와 사랑하는 이들을 연결하는 깊은 신비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거짓 자아를 벗고 참된 평화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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