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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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9,20)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신앙고백이다
다른 사도들도 알고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처럼 그분의 본성과 이름을 함께 고백한 그는 모든 덕을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만을 고백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나심에 대해 따져 묻지 않습니까?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언제 어떻게 태어나셨으며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인간의 사고라는 부실한 도구로자세히 알아내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물음은 믿음을 북돋기보다는 걸림돌임을 알았기에,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님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드님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요한 3,35 참조).
-암브로시우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3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하느님의 어머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그분 자녀들입니다(1요한 3,1).
성모님이 어떤 은총을 받았건 간에,그것은 결코 마리아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들어온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의 것입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건 간에, 을이라는 사람도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거나 다른 사람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안에 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갑이라는 사람 안에 있는 은총은 을이라는 사람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그 사람 자신의 소유라도 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영도 성령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럽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와 똑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똑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을 때 만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되어, 그분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되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서는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오히려 우리는 구별을 넘어서서 그분 자신과 똑같은 본질, 똑같은 실체, 똑같은 본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참모습을 보게 될 때”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476)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8,9-17.28-30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누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주님의 기도- 기도의 모범
“나를 육정과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며, 파렴치한 사람에게 내맡기지 못하게 하소서 (집회 23,6)이라는 기도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기도와 같습니다. “나의 하느님, 원수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나에게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시편 59,1 )라는 기도는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제 모든 종류의 훌륭한 기도문들을 다 살펴본다면 이 주님의 기도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을 지녔거나 이 기도문이 내포하지 않은 기도문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또는 저런 기도문들로 주님의 기도에 일치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와 다른 내용의 기도를 바칠 자·유는 없습니다.
이 기도문이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 우리의 친구들,나아가 심지어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함을 느끼는 자신의 형편에 따라 한 번은 이것을 위해 또 한 번은 저것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주님 저의 재산이 불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든가, “당신께서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에게 준 만큼 저에게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든지. 또는 “제가 명예로운 직책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시고, 이 세상의 삶에서 제가 권세를 잡고 유명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나, 이와 비슷한 종류의 기도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에 가득 찬 탐욕에 따라 한다면, 저는 이러한 기도가 주님의 기도와 일치하는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탐하면서 기도하는 그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그가 그런 것에 대해 부끄러운 줄 조차 모른다면 우선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란 것부터 알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것을 청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라는 탐욕에 진다면. 이러한 탐욕의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쳐준 분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