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생각에 오늘 태생소경 얘기는 거의 틀림없이 요한복음의 소설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의 소경치유 얘기를 요한복음이 각색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의 어떤 소경 또는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은 중도소경인데 비해
여기서는 태생소경이고 그래서 보지 못함을 비 구원으로 생각지도 않고
그래서 치유를 청하지도 않지만 주님께서 스스로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볼 수 없는 소경과 볼 수 있는 바리사이들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그들의 완고함을 고발하고 무엇보다도 눈 뜬 사람이 오히려 보지 못함,
특히 영적으로 더 눈이 멀어 있음을 꼬집습니다.
그런데 볼 수 있는 사람이 왜 더 보지 못할까?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영적맹인인 바리사이들도 믿기는 믿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기를 믿고 있는 것이며 잘못 믿고 있는 것이 문제지요.
사실 교만하고 그래서 완고한 사람은 자신을 믿는 사람이고
그 덕분에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고 하느님도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실로 자신감自信感은 좋은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지요.
그런데 자신감에는 교만한 자신감과 겸손한 자신감이 있고,
인간적인 자신감과 신앙적 또는 영적인 자신감이 있습니다.
인간적이고 교만한 자신감은 그야말로 자신을 믿는 겁니다.
자기가 보고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며
그래서 자기가 보고 알고 있는 것 외에는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에 비해 영적이고 겸손한 자신감은 자기 자신감의 원천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는 자신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지요.
실로 영적인 겸손은 하느님 은총의 영역과 자기 노력의 영역을 잘 알고,
기도로 청해야 할 것과 자기가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을 잘 아는 겁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아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고 똑바로 알고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잘 알아야 할 것인 자기가 ‘모르고 있음’과 ‘못보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오늘 본기도처럼 알게 하고 보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하지요.
“빛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성령의 은총으로 저희 눈을 열어 주시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분만을 믿게 하소서.”
영적인 눈은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총으로만 열리고
이렇게 영적인 눈이 열릴 때에만 오늘 사무엘기의 말씀처럼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 않게 되어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참 빛이심을 알아 뵙고 믿게 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알아 뵙고 믿기 전에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태생소경이나 바리사이나
다 영적 어둠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처럼 되어야 할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