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57-62
길 위에서 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첫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나를 따르는 길에는 세상의 안락한 둥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한곳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셨습니다.
둘째와 셋째에게는 ‘장사’도 ‘작별 인사’도 미루지 말라 하십니다.
소중한 일들이지만, 하느님 나라가 그만큼 더 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밭을 가는 농부는 앞만 보아야 이랑이 곧게 갈립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면 이랑은 삐뚤어지고 밭은 망가집니다.
따름도 그러합니다. 마음이 자꾸 ‘뒤(옛 삶)’로 향하면,
앞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걸음이 흐트러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언가를 억지로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강론자의 말처럼, ‘자유롭게 해방되라’는 초대입니다.
더 좋은 것을 향할 때, 옛것이 아깝지 않게 놓이는 법이니,
놓기가 아깝다면 아직 그분이 가장 좋은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기리는 성 예로니모가 이 복음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손꼽히던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명성과 안락을 뒤로하고,
베들레헴의 한 동굴로 들어가 단순한 삶을 택했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와 단순함 속에서,
그는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옮기는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이 ‘불가타 성경’은 천 년 넘게 온 서방 교회의 성경이 되었습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가 말씀을 깊이 사랑했듯,
예로니모도 온 삶을 ‘하느님의 말씀’ 하나에 바쳤습니다.
일치의 눈으로 보면
예로니모의 성경은 교회를 ‘하나의 말씀’으로 모았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공통의 터입니다.
우리가 함께 ‘같은 말씀’으로 돌아갈 때, 서로 가까워집니다.
일치의 길은 ‘공유하는 말씀’을 지나갑니다.
영성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예로니모의 삶은 영성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로마를 떠나 동굴로’ ― 소란과 잡다함을 내려놓고,
‘한 가지 필요한 것(말씀이신 그리스도)’으로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로니모는 늘 ‘마지막(영원)’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자꾸 ‘뒤(옛 삶·미련)’를 돌아보며 걸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는가?
나는 ‘버림’을 손해로 여기는가, ‘자유’로 여기는가?
나는 갈라진 이들과 ‘함께 말씀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나는 하루를 ‘영원(마지막)’의 빛 안에서 사는가?
주님,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한 가지로 단순하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버림을 자유로 누리게 하시고,
함께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