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자비는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1
용서받는 자비에서 용서하는 자비로
자비라는 말을 오래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 안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자비는 어느 한 사람의 마음속에 고여 있는 아름다운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나에게로 흘러오고, 나를 적시고 살린 뒤 다시 나를 지나 형제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덕이 아니라 흘러가도록 나에게 맡겨진 선물이며, 내가 다른 사람보다 너그러워서 베푸는 무엇이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받은 것을 다시 흘려보내는 은총입니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나에게 자비로우셨고,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전에 이미 나는 수없이 용서받았으며, 내가 누군가를 기다려 주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내가 돌아오기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시작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지 않고, 내가 이미 무엇을 받았는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그의 질문에는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도 한계를 정하고 싶어 하고, 기다림에도 끝을 정하고 싶어 하며, 용서에도 횟수를 정해 두고 싶어 합니다. 한 번은 참을 수 있고 두 번은 이해할 수 있으며 몇 번쯤은 용서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이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용서의 횟수를 더 많이 늘리라는 뜻이라기보다 자비를 계산의 세계에서 해방시키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을 세지 말고, 용서를 기록하지 말며,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를 장부에 적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때마다 횟수를 세셨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그분의 자비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흔일곱 번의 용서는 결코 쉽고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어떤 상처는 한 번 용서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기도하며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내일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마음이 아플 수 있고, 오래전 들었던 한마디가 어느 날 갑자기 기억 속에서 살아나 가슴을 찌를 수도 있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던 상처가 뜻밖의 순간 다시 눈물이 되어 흐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기 쉽지만, 어쩌면 일흔일곱 번의 용서란 바로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주님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번의 용서로 끝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상처가 다시 살아날 때마다 다시 용서의 길을 걸어도 된다고, 오늘 다시 시작하고 내일 또다시 시작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번의 용서는 같은 사람을 계속 용서하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서 일흔일곱 번 되살아나는 상처를 일흔일곱 번 하느님의 자비 앞으로 데려가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여라.”라는 말씀은 더욱 깊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며, 잘못된 일을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해친 사람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용서는 진실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는 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상처와 악이 내 삶의 마지막 말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한 일은 분명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아팠고 어쩌면 아직도 아픕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잘못을 붙들고 남은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잘못이 당신이라는 사람의 전부라고 말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조금씩 고백해 가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와 화해는 같지 않습니다. 용서는 내 마음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화해는 서로의 진실과 책임과 변화가 필요합니다. 때로 자비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거리를 두는 것이며, 모든 것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책임져야 할 것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감당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비는 악을 허용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악에게 인간 존재의 마지막 말을 넘겨주지 않는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참된 용서는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의미를 바꾸고, 상처를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더 이상 미움의 샘이 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운 가장 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자신이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복음에서 자비의 순서는 언제나 내가 용서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기 전에 나는 자비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누군가를 품어 주는 사람이기 전에 이미 수없이 품어짐을 받은 사람이며, 내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견디는 사람이기 전에 누군가가 나의 부족함을 오래 견디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완전해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넘어지고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당신 자비 안에 품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받는 자비’는 인간을 낮은 자리로 데려갑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고, 누군가의 말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사람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 남는 상처를 남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지만 내일은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오늘 내가 누군가를 품어 주지만 내일은 내가 누군가의 품 안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비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서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형제성의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용서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가난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자신이 용서받는 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용서받으려면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내가 옳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자비와 기다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의 자존심에게는 어려운 말이지만 영혼에게는 자유의 문을 열어 주는 말입니다. 내가 자비를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사람의 가난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용서받는 자비는 받아들이는 가난이 되고, 용서하는 자비는 내어주는 가난이 됩니다.’ 한쪽 손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다른 손으로 그것을 형제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받은 바로 그 자비가 나를 지나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사랑이 아니라 받은 사랑이 흘러가고, 내가 만들어 낸 인내가 아니라 나를 기다려 주신 하느님의 기다림이 흘러가며, 내가 만들어 낸 용서가 아니라 내가 이미 받은 용서가 형제에게로 흘러갑니다.
어쩌면 자비의 반대는 미움만이 아니라 ‘붙잡음’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상대방이 내게 한 잘못을 붙잡고, 그날 들었던 말을 붙잡고,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붙잡고, 내가 옳았다는 사실을 붙잡으며, 때로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다는 사실마저 붙잡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붙잡다 보면 어느 순간 두 손이 가득 차서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건네줄 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놓아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잘했다고 말하며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심판하고 응징하고 기억하는 일의 최종 권한을 내가 움켜쥐지 않고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풀어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 묶여 있던 나를 풀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