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영적 여정 9.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
귀고의 『수도승의 사다리』와 영적 상승, 인간은 오래전부터 하늘을 향하여 사다리를 놓고 싶어 했습니다. 야곱이 베텔에서 꿈꾸었던 사다리처럼, 땅과 하늘을 이어 주는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 사다리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인간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갈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은 그리움, 흙으로 빚어진 존재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손을 뻗는 갈망이 바로 그 사다리였습니다.
중세 수도승들은 이 갈망을 영적 여정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도 영향력 있는 작품이 카르투시오회의 귀고 2세가 남긴 『수도승의 사다리입니다. 귀고는 기도를 하나의 사다리로 설명합니다. 그 사다리는 네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서, 묵상, 기도, 관상, 이 네 단계는 단순한 기도 방법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첫 번째 계단은 독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독서는 정보를 얻기 위한 독서가 아닙니다. 말씀 앞에 오래 머무는 독서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독서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내 삶을 이해하도록 허락하는 시간입니다. 수도승들은 한 구절을 수없이 되새기며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은 책 속에 있는 문장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이었습니다.
두 번째 계단은 묵상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머리로 분석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슴으로 품는 일입니다. 읽은 말씀이 내 삶과 만나고, 내 상처와 만나고, 내 기쁨과 만나고, 내 죄와 만나도록 오래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묵상은 성급하지 않습니다. 씨앗이 흙 속에서 천천히 싹을 틔우듯, 말씀이 존재 안에서 생명을 품도록 기다립니다.
세 번째 계단은 기도입니다. 이제 사람은 말씀 앞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감사와 눈물이, 회개와 기쁨이, 찬미와 탄식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노래가 되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기도는 더 이상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마지막 계단은 관상입니다. 귀고는 관상을 인간이 만들어 내는 행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관상은 선물입니다. 인간이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간다고 하여 하느님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실 때, 인간은 잠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관상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 사로잡히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귀고의 사다리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독서가 묵상을 낳고, 묵상이 기도를 낳으며, 기도가 관상을 낳습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나의 방향으로 모여 갑니다. 이 길은 수많은 수도자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교회의 영성을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아름다운 사다리 앞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인간이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이 먼저일까? 프란치스코는 먼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십자가에는 이미 인간에게 내려오신 하느님이 계셨습니다. 사다리는 인간의 갈망을 말하지만, 십자가는 하느님의 갈망을 말합니다. 사다리는 인간이 하느님께 가려는 이야기라면, 육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시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수도승 전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중심을 새롭게 비춥니다. 사다리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다리는 인간이 홀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먼저 내려오셔서 우리 곁에 세워 놓으신 사랑의 다리 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이미 내 곁에 오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를 먼저 묻습니다. 이 질문 하나가 영적 여정 전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독서는 이제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육화하신 말씀을 바라보는 일이 됩니다. 묵상은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일이 됩니다. 기도는 하늘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이미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가 됩니다. 관상은 멀리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과 형제 안과 피조물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이 됩니다. 그리고 이 길은 성녀 클라라에게 와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귀고가 독서-묵상-기도-관상이라는 사다리를 제시하였다면, 클라라는 바라보기-깊이 생각하기-관상하기-닮아가기라는 사랑의 여정을 제시합니다. 사다리는 위를 향해 오르지만, 사랑은 안으로 스며들고 밖으로 흘러갑니다. 이제 기도는 올라가는 기술이 아니라, 사랑을 닮아가는 생명의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프란치스칸 기도의 독창성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