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저는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에 독서로 로마서를 읽고 묵상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믿음에 대한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왜냐면 독서가 믿음 덕분에 주어진 은총들을 얘기하고 있는데
김대건 성인을 비롯한 성인들은 이런 은총을 누린 분들이게
그 혹독한 박해와 환난을 이겨내었음을 묵상도 하며 본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먼저 믿음 덕분에 지니게 되는 평화를 얘기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이 평화는 틀림없이 관계적 평화입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좋은 관계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때
좋으신 하느님이요 나를 위하시는 하느님으로 믿는 거지요.
불신이야말로 모든 관계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관계가 평화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우리의 관계적 평화를 더 위협할지 부부간의 관계를 예로 보면
가난과 빚쟁이로 인한 시달림이나 위협과 외도로 인한 신뢰 관계 훼손 중에서
어떤 것이 관계적 평화를 더 깨뜨리겠습니까? 신뢰 관계 훼손이 아니겠습니까?
신뢰만 서로 간에 있다면 가난이나 빚 독촉은 관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 더 힘을 합쳐 이겨내게 할 것입니다.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고,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신뢰 관계가 깨졌을 때
우리는 어느 한순간 어떤 한 부분에서 평화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가 불안해지면서 관계적 평화가 깨지게 되겠지요.
저의 인생 초반은 하느님 존재의 유무에서부터 불신이 있었고,
계실지라도 그 하느님이 제 아버지를 일찍 데려가심으로 제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신 분이라 믿었기에 그때 제 인생은 평화롭지 못했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좋으신 하느님으로 믿기 시작할 때부터는
하느님이 제 배에 함께 타고 계신 것처럼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김대건 신부님도 마찬가지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 때 용수 성지에 가서 그 묵상을 할 계획이지만
쪽배로 중국에 오고 가실 때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오가셨을 겁니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의 은총을 얘기하는데
박해와 환난 가운데 평화로움에 이어 박해와 환난 가운데 희망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평화가 현재적 은총이라면 희망은 미래적 은총이고,
현재에서부터 영원한 미래에까지 이어지는 은총입니다.
아 정정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에 영원한 평화도 은총으로 주어지지요.
그런데도 희망이란 죽고 난 뒤 상급으로 받게 되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 희망을 바오로 사도가 말하기 때문이고,
김대건 신부님도 그런 희망으로 현재의 고통을 견디며 이겨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주는 평화와 희망,
이것을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 특히 청해 받아
김대건 신부님과 우리 순교자들의 뒤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