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번 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로 우리는
치프리아노 성인의 ‘주님의 기도’ 묵상을 내내 읽습니다.
어제 성인은 이렇게 주님의 기도 한 부분을 묵상하고 나눕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스리지
아니하시는 때가 있습니까? 과거에 항상 있었고 또 미래에도 중단이 없으실
하느님의 나라에 시작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 시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있었고 나는 늘 하느님 나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 나라가 있다고 고집할 때부터 나는 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 나라가 없으면 하느님 나라가 제 안에서 자동 시작되는 겁니다.
내 나라가 없으면 나는 자동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 나라가 있는 것이 좋을 것만 같지만 내 나라가 있으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내 나라에 갇히는 꼴이 됩니다.
이는 은둔형 외톨이가 자기 방에 갇히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한집에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 방의 문을 닫고 거기에 갇힙니다.
종종 Privacy(사적 공간)를 과하게 고집하면 이렇게 되곤 하지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자유가 침범당할까 너무 두려워하여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방과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내게 오심을 막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여는 것이 이미 와 계신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치프리아노 성인은 아버지의 뜻을 이룸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그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겸손, 행동에 있어서의 정의,
활동에 있어서의 자비심,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받는 해를 잘 참아 내는 것,
형제들과 화목을 유지하는 것,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더 사랑하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 것, 이 모든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그리스도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잘 따르기만 하면
우리도 우리의 뜻이 곧 하느님의 뜻이 되는 경지에 도달할 터인데,
프란치스코는 말년에 이렇게 되도록 다음과 같이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저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이 경지를 얘기할 때 저는 공자의 그 유명한 나이론을 얘기합니다.
공자는 나이 서른에 입지, 마흔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을 얘기한 다음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를 얘기합니다.
나이 칠십이 되면 욕심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가 돼야 한다는 말인데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으로 바꿔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올라 있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경지로 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자문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