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가지 확신에 대한 묵상 3
3. 나의 자유는 사랑 받고 있음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자유는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은 예속이 아닌 기쁜 투신 안에서 다 깊게 알 수 있습니다. 자유란 내 마음대로 선택하는 방종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사랑하신 분께 기꺼이 손을 내어드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응답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았기에, 이제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닮아갈 자유를 얻었습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조용히 덮어줄 때, 내 고집을 내려놓고 먼저 미소 지을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의 곁에 묵묵히 머물 때, 우리의 자유는 가장 빛나는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억지로 짊어진 의무가 아니라,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이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환희의 응답입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제자의 발을 씻기셨던 그 자유를 닮아, 우리 또한 서로의 삶 속에 기쁜 선물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 확신은 우리를 오늘의 아주 소소한 관계들 안에서 평화의 도구로, 위로의 통로로, 기쁨을 지키는 조용한 파수꾼으로 세워 줄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선을 선택하는 작은 순간들이 바로 그 현장입니다. 사랑에 응답하는 자유는 감동적인 결단보다 훨씬 사소한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약속을 지키는 것,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오늘은 최소한 험담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성공적으로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사랑 쪽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는가입니다. 자유는 늘 기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 이후에 찾아오는 잔잔한 평화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 평화는 “내가 잘했다”는 만족이 아니라, 선의 흐름과 다시 연결되었다는 신호입니다. 덜 말하기, 조금 늦게 판단하기,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더 부드럽게 응답하기,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이미 사랑 안에 계신 하느님께 당신이 내어드릴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자유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먼저 와 있고, 우리는 그 사랑에 조금 늦게, 그러나 진짜로 응답하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나의 자유는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은 예속이 아닌 기쁜 투신 안에서 다 깊게 알 수 있습니다. 자유란 내 마음대로 선택하는 방종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사랑하신 분께 기꺼이 손을 내어드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응답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았기에, 이제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닮아갈 자유를 얻었습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조용히 덮어줄 때, 내 고집을 내려놓고 먼저 미소 지을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의 곁에 묵묵히 머물 때, 우리의 자유는 가장 빛나는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억지로 짊어진 의무가 아니라,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이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환희의 응답입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제자의 발을 씻기셨던 그 자유를 닮아, 우리 또한 서로의 삶 속에 기쁜 선물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 확신은 우리를 오늘의 아주 소소한 관계들 안에서 평화의 도구로, 위로의 통로로, 기쁨을 지키는 조용한 파수꾼으로 세워 줄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선을 선택하는 작은 순간들이 바로 그 현장입니다. 사랑에 응답하는 자유는 감동적인 결단보다 훨씬 사소한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약속을 지키는 것,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오늘은 최소한 험담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성공적으로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사랑 쪽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는가입니다. 자유는 늘 기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 이후에 찾아오는 잔잔한 평화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 평화는 “내가 잘했다”는 만족이 아니라, 선의 흐름과 다시 연결되었다는 신호입니다. 덜 말하기, 조금 늦게 판단하기,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더 부드럽게 응답하기,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이미 사랑 안에 계신 하느님께 당신이 내어드릴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자유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먼저 와 있고, 우리는 그 사랑에 조금 늦게, 그러나 진짜로 응답하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내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는 바로 이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마태 12, 49-50) 이 말씀은 혈연의 울타리를 넘어 '하느님 중심의 새로운 가족'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이 말씀은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지침이 됩니다. 위에서 나누었던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 가지 확신과 이 말씀을 엮어, 프란치스칸적인 고백을 담아 이어가 봅니다.
사랑을 살아내는 이들의 연대
우리는 이제 혈육의 이름표를 떼어내고 하느님의 뜻이라는 커다란 강물에서 다시 만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확신을 길어 올리는 사람은 이미 내 곁의 타인을 남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 그것은 거창한 제단 위의 제물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건네진 이웃의 슬픔을 함께 짊어지는 일이며, 성 프란치스코가 나병 환자의 손을 잡았을 때 맛보았던 그 비위에 상했지만 달콤한 화해의 신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절실히 깨달을 때, 내 앞의 형제는 더 이상 경쟁자나 걸림돌이 아닙니다. 그 또한 나와 똑같이 그분의 눈동자 속에 담긴 보석이며, 우리는 같은 생명의 젖줄을 나누어 마시는 한 식구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내 곁의 누이는 나의 거울이 되고, 내 앞의 형제는 나의 지팡이가 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미움 대신 용서를, 소유 대신 나눔을 선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어머니'가 되어줍니다. 서로의 영혼 속에 하느님의 선하심이 잉태되도록 돕고, 서로의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자라나도록 품어주는 그 지극한 돌봄이 바로 우리를 하늘 가족으로 묶어주는 끈입니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도 형제라 불렀던 사부 프란치스코처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우리는 이제 고아가 아닙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집이며, 만나는 모든 이가 나의 혈육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에 응답하는 우리의 발걸음마다 새로운 형제가 태어나고, 다정한 누이가 웃음 짓고, 따스한 어머니의 품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 안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서로에게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되어주는 삶은 때로 희생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일치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