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는 겸손한 자기 관상에 관해서 묵상과 나눔을 하였고,
오늘은 겸손한 하느님 관상을 할 거라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하느님 관상에 관해 묵상하는데 이때 떠오른 생각이
바로 ‘겸손하다고 해서 다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은 아니다.’였습니다.
물론 교만한 사람이 하느님 관상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니
겸손이 하느님 관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겸손하면 자동 하느님 관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인간적으로 겸손한 것만으로는 하느님 관상이 불가능하고,
영적으로 겸손해야만 하느님 관상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자 요한도 성령께서 주님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는 것이 성령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성령의 눈이 없으면 성령도,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위에 머무신 성령께서 세례자 요한에게도 머무셨을 겁니다.
관건은 이제 우리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성령의 눈을 지닐 수 있는가 그것입니다.
이를 위해 겸손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이 그저 인간적인 겸손이 아니라
어제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나 프란치스코처럼 극적으로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되든지
클라라나 데레사처럼 자연스럽게 하느님 앞에 있게 되든지
어떻게든지 영적인 수동태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하느님 체험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고기를 잡으러 여느 때처럼 나갔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있는 힘이란 능력과 노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이란 능력과 노력 두 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오랜 고기잡이로 능력이 갈릴래아에서 최고였습니다.
그날 밤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으니 베드로는 노력도 다했습니다.
그러면 평소 같으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어야 했는데 허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 허탕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모든 하느님 체험의 공식입니다.
나의 힘이 다했을 때 하느님의 힘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의 때가 다했다거나 그의 힘이 다했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능력도 다하고 노력도 다해 이제는 더 이상 힘이 없다는 뜻이고,
내 힘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내 힘이 하나도 없을 때 두 가지입니다.
다른 인간에게 힘을 빌리려고 들던지 하느님께 눈을 돌리든지.
그런데 인간에게 힘을 빌리려던 것까지 허탕이 되었을 때
그때 하느님께 눈을 돌릴 수 있게 되고
그때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심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은총의 때이고 영적인 겸손의 때인데
이때 받은 성령의 눈으로 하느님을 관상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