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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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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묵상하며

안토니아눔의 프란치스칸 영성 교수였던 크리스토포로 보베(Cristoforo Bove)가 쓴 “구유”라는 작은 책자에 의하면, 1223년 프란치스코가 그렉치오의 동굴에서 성탄 축제를 지낼 때, 조각된 아기 예수는 없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양과 말들을 데려오고, 건초를 준비한 후 제대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대 위로 내려오신 예수를 베들레헴의 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로 경배하였다는 것이다. 즉, 프란치스코는 성탄 미사를 위해 준비된 제대를 구유로 삼아 이 구유에서 축성된 성체를 새로 탄생한 아기 예수로 경배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영성 안에서 성탄과 성찬은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며 동일한 사건이다. 보이지 않는 성부의 신비를 드러내주는 성자의 신비, 특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신비를 관상하고 있는 프란치스코의 권고 1에는 보베 교수의 주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로부터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이와 같이 프란치스코가 성체 안에서 육화의 신비를 관상하고 육화 안에서 성찬의 신비를 관상하기 때문에, 성탄을 앞두고 이를 묵상하고 싶다.


2007년 10월 관상 기도 모임 성지 순례 일정 중에는 피렌체와 밀라노에 있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감상하며 “관상”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있었는데, 밀라노의 도미니코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는 이 작품은 수도자들이 매일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묵상하면서 식사를 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부식으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어, 관람 시간과 인원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고, 예약을 통해서만 관람을 할 수 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작은 수도원 식당에 다 빈치의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밀려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순례 날짜와 시간에 맞추어 예약하느라 몇 달 전부터 무척 애를 많이 썼다. 어렵게 어렵게 예약을 해놓고 10월 26일 오전, 우리 서른 세 명의 일행은 빗속에 질척이는 밀라노 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약 시간에 맞추어 좀 들뜨고 기대어린 마음으로 서둘러 박물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파업으로 박물관 문이 굳게 닫혀져 있는 것이었다. 아, 답답한 문!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만은 “꼭” 보리라고 벼르고 별렀는데...! 반드시 보리라던 집념이 너무도 어이없게 무너져 버렸다. 아, 저주 받을 이탈리아!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동안 이 신비의 작품을 잘 관상하기 위해 로마에서부터 여러 박물관들을 순례하며 잘 준비해 왔는데, 그동안의 애씀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기운이 빠지고 맥이 빠져 뒤돌아서는 순간, “아, 내가 다빈치의 작품에 너무 집착했나?”. ‘집착의 포기’가 온갖 집념과 애착으로 들러붙어 있던 내 가슴을 내쳤다. 집착의 포기!!! 그렇다. ‘내 뜻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음’은 “최후의 만찬”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밀라노 거리를 내 마음속에 그려진 또 다른 “최후의 만찬”을 감상하며 두오모 대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가 늘 묵상하고 관상해왔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고 평온하게 머물러 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최후의 만찬을 통해 놀랍게 그려놓았다. 세로 4.6 미터, 가로 8.8 미터의 거대한 이 프레스코화 앞에 서면, 아무리 조각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 앞에서는 절로 탄성을 올리듯이, 누구라도 이 벽화에 서려 있는 신비감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다 빈치의 이 “최후의 만찬”만큼 예술품의 신비로움이 흠씬 느껴지는 작품이 과연 또 있을까?

이 작품은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중에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마태오 26,21)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놀라워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여기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요한 13,23-24)는 요한 복음의 말씀도 포함시켜 놓았는데, 이는 예수의 바로 오른편(그림의 왼쪽)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방금 놀랍고 비극적인 말을 한 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조용히 깊은 고요 속에 머물러 계시는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움과, 스승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고 당혹스러움과 어리둥절함과 두려움에 뒤섞여 혼란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흥분된 모습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극렬한 드라마의 결정적인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벽화를 보면 볼수록 그 심오한 세계로 도저히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사도는 자신들의 사랑과 죄없음을 호소하는 것 같고, 어떤 사도들은 주님께서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는지 심각하게 논의하는 듯하며, 또 다른 사도들은 예수의 설명을 더 들으려고 망연자실 쳐다보는 것 같아 보인다. 성미가 급하고 충성스러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자마자 요한에게 달려가 긴박하게 무엇인가 귀엣말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우직함이 그와는 정반대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 유다를 앞으로 떼밀어 내어, 이 비극의 제자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하나의 선처럼 연결되어 있는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앞쪽으로 좀 밀려나면서 고립됨으로 인해, 유다의 절망적인 운명이 어두운 색조와 더불어 더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 유다의 모습에는 언뜻 보기에 어떤 몸짓이나 질문이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반항하는 듯 몸을 뒤쪽으로 젖히고 의심과 분노에 찬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올려다보고 있는 비극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제자들의 갑작스런 혼란 속에서도 이와는 아랑곳없이 초월 세계에 깊이 잠기어 있는 듯, 한없는 고요와 형언할 수 없는 평화 속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맡기고 평온히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너무도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한결 돋보이고 있다. 

그리고 유다가 이처럼 예수와 대조적인 모습으로 제자들 무리 안에 숨겨져 있다는 얘기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안에 유다의 모습이 눈치채기 어렵게 숨어 있다는 뜻일 것이고, 더 정직하게는 “나”의 평범한 삶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유다적인 모습이 어두움을 드리운 채 그렇게 도사리고 있음을 넌지시 지적해주는 것 아닐까!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한 목격자에 의하면 다 빈치는 받침대 위에 올라가 그가 그려놓은 벽화를 응시하며 하루종일 붓 한번 대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깊은 명상에 잠기곤 했었다 한다. 이 목격자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최후의 만찬”을 잠시만이라도 응시하면 이 작품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깊은 명상과 관상이 스며져 있음을 이내 알 수 있다. 애석하게도 관상 기도회 순례단은 이 놀라운 진품을 접하는 기회를 잃고 말았지만, 다 빈치의 이 실제 작품 앞에 서면 누구든지 이 벽화를 진하게 휘감고 있는 어떤 신비로운 “서기”를 즉시 느낄 수 있으며, 이 만찬이 주는 그 놀라운 신비로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탁월한 예술가요 놀라운 신비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빵이라는 것, 다시 말해, 빵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신비 아닐까?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인류에게 내주어진 신비의 빵, 사랑의 빵으로 묘사되어 있다.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순간, 빵으로서 축성되는 그리스도의 운명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최후의 만찬은 이 운명의 드라마의 첫 순간이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안에서 포착되어 있다. 이 운명의 순간, 예수는 그의 모든 의지를 포기하고 배반자 유다의 뜻에 온전히 내맡겨져 있는 모습이다. 배반자의 뜻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내어맡기는 그리스도의 무의지의 의지! 제자들이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었겠으랴.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기막힌 의지 포기로 말미암아 한없는 고요와 평화 속에 들어가 계시다. 배반자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그 배반자마저 끌어안고 절대 침묵의 심연 속에 들어간 그리스도의 신비! 이것이 곧 신적인 사랑의 신비요, 온전히 성부께 순종하는 “나의 의지 없음”, 즉 존재론적인 “무화(無化)”의 신비, 존재론적인 가난의 신비이리라. 이 “의지 없음”을 통해서 사랑의 빵이 되는 그리스도의 신비, 그 사랑의 신비를 레오나르도가 표현하고자 싶었던 게 아닐까!

성자께서 육화하신 신비를 묵상하는 축제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스도께 육화하신 베들레헴은 어원적으로 “빵집”, 즉 식당, 음식점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즉, 성탄절은 온 인류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동정녀 마리아가 베들레헴이란 식당에 온 인류가 먹을 빵 그리스도를 구워 식탁에 차려 놓는 날이다. 그렇게 보면 생명의 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소와 양들의 여물통에 마치 여물처럼 놓여졌다는 복음 말씀은 그 자체로 이미 놀라운 시적 은유이며 신비로운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성탄은 하느님이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어, 당신의 순결한 여종 마리아를 통해 베들레헴 식탁에 형언할 수 없이 감미로운 빵, 그리스도를 굽고, 단 한 사람도 제외됨 없이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경이로운 사랑의 축제이다. 성탄의 신비는 곧 빵의 신비, 성찬의 신비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빵의 신비 안에서 육화의 신비가 곧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성체의 신비임을 관상하면서, 이 사랑의 신비 앞에 압도되어 자신의 전존재를 내어던졌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노라면, 그 역시 프란치스코가 잠겨들었던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고 이를 벽화로 그려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빵이 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신비께서 형제 자매님들과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리며... 대림 제3주일에!!!


* 이 글의 많은 부분은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참고하고 인용하며 작성하였습니다.

**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www.haltadefinizione.com 에 들어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사이트에 들어 있는 최후의 만찬은 보수된 이후의 사진으로 본인이 원하는 대로 확대하면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처음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작은 모양의 “최후의 만찬”이 나타나는데, 이 그림 위쪽에 있는 “Look”이라는 부분을 클릭하시면, 확대하고 이동하시면서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표정을 잘 보셨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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