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1-42)
우는 이들의 참행복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
우리 구원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 이렇게 하심으로써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참행복들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신 바를 몸소 증언하신 것이지요. 그분은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 대해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하셨지요. 또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신"(에때 2,14-15 참조) 우리 주 예수님보다 큰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분이 누가 있습니까? 그분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만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참행복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해 우시며 말씀하셨지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런 다음 그 이유까지 일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예수는 목숨을 버릴 만큼 버림으로 충만해 있었다. 신적인 말씀은 사람이 될 만큼 버림에 활짝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인간성을 버리고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버림으로 충만해져야 할 차례다. 성령을 파송받으려면, 예수마저도 버려야 한다 - 예수는 죽었다가 승천해야 했다. 엑카르트는 경고한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현존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예수는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성령이 올 수 없다고 벗들에게 말했다(요한 16.7 창조). 하느님의 새 아들이 우리 안에서 태어나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버려야만 한다. 이처럼 철저
한 버림의 의미로 보건대 엑카르트의 영성심리학은 종교적인 강박증은 물론이고 일체의 강박증에 맞서는 심리학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모든 행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과 우리의 신성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흘러 나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수의 행위 중에서 자비야말로 가장 충만한 행위다. 넷째 오솔길에서 살펴보겠지만. 액카르트에게 자비는 정의를 뜻한다. 실로 예수는 “정의의 아들”이다. 그는 실제로 사람이 된 신적인 자비의 화신이다. 신적인 자비가 사람이 된 까닭은 짐을 짊어지고 고난을 견딜 “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신성이 인간의 고난으로부터 자비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실로, 그리스도는 “태어나지 않은 정의 그 자체”이며, “정의의 열매이자 아들”이다. 의로운 사람이 정의 자체와 관련되어 있듯이, 그리스도도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자비의 화신인 이 정의의 아들을 본받아야 한다.(508)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10-13장 / 야고 1-5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막이 열리다
갑자기 세 부인이 수도복을 보고 그 앞에 멈추었다.
“도로테아회의 수녀님들이시죠 ?"
“네, 그렇습니다"
“포르투갈 분이신가요? 투이에서 오시는 건가요?"
“네 "
“마침 우리도 투이로 가는 중입니다. 파티마에서 발현을 본 루치아 수녀님을 만나고 싶어서요. 그분은 스페인에 계시죠?"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포르투갈에 있어요"
하고 루치아는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야단났군"
“참말이구 말구요. 포르투갈에 있습니다"
“만일 루치아 수녀님이 투이에 계시다면 만날 수 있을까요? 퍽 어려운 모양이던데"
“틀림없이 만납니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라니요? .... 지금 저를 보는 것처럼입니다."
부인들은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젊은 두 수녀는 발렌사로 통하는 다리 --쓰이지 않을 때는 거두어 올려 놓는 장치가 되어 있음--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마치 어린이와 같이 흥겨워 웃으면서 ...... 실상 두 사람은 단순함과 천진함에서 진정 어린이 같았다.
‘통고의 마리아’는 언젠가 뽄뜨베드라 가까이 있는 또야라는 작은 해변가에서 며칠 쉬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별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수녀에게 말했다.
“파티마의 성모님을 본 처녀가 투이에 있는 모양이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 믿을 만한 신문에서 얽었는데요.”
수녀는 시치미를 떼고 어디까지나 모르는 척하면서,
“그렇습니까 ? 그렇다면 그럴 것입니다…제가 그 사정을 잘 몰랐던 것이죠 ..
그녀는 여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순박함과 함께 함구령을
철저히 지키려는 굳은 의지의 융합에서 생긴 귀여운 장난을 하였다.(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