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발생한 끔찍한 참변을 보면서 회개를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고의 희생자들을 보면서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며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러합니다.
참변은 그들 몫이고 그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내 몫이 아니고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변에서 제외된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나 참변을 당할 수 있고 누구나 회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
누구나 희생되기 전에 곧 죽기 전에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이래 죽건 저래 죽건 다 죽고,
오래 살다가 죽건 일찍 죽건 다 죽는데
어떻게 죽고 어떻게 되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하게 죽고 행복하게 되느냐,
그렇지 않냐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 행복하게 죽고
죽고 난 뒤 행복하게 되는 것은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아시다시피 천상병 시인은 이 시처럼 그렇게 즐거운 소풍을 하고
하늘로 돌아간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말입니다.
동백림 간첩 사건에 무고하게 휘말려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구자처럼 살았으니
소풍치고는 고약한 소풍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랬기에 그는 진즉 땅에서 하늘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회개는 귀천입니다.
회개가 돌아서는 것이요 돌아가는 것이라면 귀천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육의 관심사와 성령의 관심사를 얘기하는데
육의 관심사는 죽을 때가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세상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면 성령의 관심사는 하늘 관심이 아닐까요?
하늘 관심이 있을 때 이 세상 어떻게 살든 소풍으로 여길 수 있고,
이래 죽든 저래 죽든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 행복일 수가 있습니다.
육의 관심사에서 성령의 관심사로 관심이 바뀌는 회개를 시작합시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