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 인간의 비참함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선을 바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바라지 않는 악은 도리어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볼 때 법칙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법칙이란
바로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를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역동을 더 선명히 느낍니다.
예를 들어 저는 미사를 드릴 때 갈수록 그 신비에 깊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부분에서 거의 빠짐없이 신비를 깨는 생각이 훅 들어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잡생각이 훅 치고 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 느닷없이 생각나고,
어떤 때는 거룩함과 정반대되는 음란한 생각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도 자주 반복되기에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정말 사탄이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가고자 하는 우리의 거룩한 원의에
반원의(反願意)가 안팎으로 항상 있습니다.
반원의가 안팎으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밖의 사탄과 안의 반원의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안의 욕망이 없을 땐 밖에서 사탄이 아무리 유혹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배가 고프고 술이 고플 때 먹자고 꾀야 그것이 유혹이 되고 넘어가겠지요.
그런데 내 밖 사탄의 준동에 내 안에서 반응하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육의 나”라고 하고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정신”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나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 체험을 강하게 했을지라도
육의 나나 육의 영이 내 안에서 말끔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본능이 사라지거나 습관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니며,
맛들이고 길들어진 내가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육체의 내가 완전히 죽어야지만 사라질 것이고,
이 육체의 내가 살아있는 한 육의 나도 살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서 강력히 활동하실 땐 음성적으로 있다가,
곧 죽은 척 있다가 때가 되면 슬며시 다시 살아날 겁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라는 주님 말씀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주인님께 대해서도 깨어 있고,
본능과 습관과 육의 나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