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2)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
본성에 따라 만유의 하느님이신 분이 모든 거룩한 이들 가운데 가장 거룩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확고히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지고한 위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경외하며 바르고 흠 없는 삶을 꾸려 나가게 되며, 이로써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 거룩하신 하느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그런즉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라는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거룩히 드러내시며’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하고 기도할 때, 그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도록 다른 무엇을 어떻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이보다 더 쓸모 었고 가치 있는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엑카르트는 이 인용문을 바탕으로 하여 본 설교에서 몇 차례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요한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우리가 신비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진리의 온전한 의미를 아직은 모른다. 그는 요한 1서 3장과 4장의 외에 따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리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규명한다. 이 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열매로 그틀을 알아보시오’(마태 7.20).
그는 우리의 낳음과 열매가 참된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자리에서 지적한 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몇 가지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 22에서 그는 하나의 표지를 제시했다. 그는 본 설교에서 네 개의 표지를 더 제시한다.
이 표지 가운데 첫째 것은 안에 있음이다. 엑카르트는 그리스도론적인 만유내재신론의 진술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지혜 안에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빛이 공기 속에 잠겨 있고, 조명을 받은 빛이 조명 자체가 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잠져 있다. 우리는 아들이 지닌 것과 동일한 본질올 지님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483)


<금주간 성서읽기> 1코린 3-8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하나의 거대하고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역사적인 과정, 다시 말해 큰 형식의 혁명에 대하여 어떤 개별적인 인물이,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드물었다” (J. Lortz).
이 종교개혁가 이전에 이미 한번이라도 생각되었거나 이야기된 적이 없는 사상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새로웠고 또 동시대인물에게 새로운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 만큼, 그는 모든 것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종교개혁은 완전히 그의 독특한 고유의 작품이었다. 그가 이 운동 전체를 일부러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는 당시의 종교적 • 정신적 • 정치적 • 사회적인 모든 불안이 총괄되어 있던, 너무나 가득차 있던 화약통에 불똥을 던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다음 그는 이 불에다 자신의 인격의 무게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관철력을 부여하였다.
가톨릭적 루터상:
루터의 가톨릭적인 모습은 테니플레의 저술(1904∼ 1909)과 그리사르의 저술(1921∼1930)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불쾌한 논쟁은 이 종교개혁가를 그의 시대와 그의 의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에 굴복하였다. 우리는 중세 후기 교회의 불쾌한 상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던 그가 지녔던 관심사의 정당성과 함께 그의 개혁 의도의 순수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신도 사실은 교회 안에서 현저하게 시작한 개혁 의지의 하나의 대표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원기왕성하게 출현한 그가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를 거슬러 종교개혁가가 된 것 바로 그것이 비극이다.
루터가 1517년에 테첼의 대사 거래를 반대하였을 때, 그는 교회의 순수한 가르침의 대변자로서 거룩한 것들을 정말로 부끄러운 방법으로 거래하고 있는 남용을 반대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미니코회원과의 대결은 신학적 학설의 대립으로 빛을 잃어버렸다.(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