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자의 불행을 자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독서는 주님 말씀을 듣지 않았음을 자각한 자의 뉘우침입니다.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성찰하면
바룩서처럼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면 행복의 길이 열리겠지만
코라진, 벳사이다처럼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리 살면 불행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독서와 복음에서 잘못이 뭐냐 하면 듣지 않음,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요,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말씀을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미워하여 불행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고 계속 그리 사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며 불행에서 행복으로 회개하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불행이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듣지 않고,
사랑하셔도 그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인데,
왜 듣지를 않고 왜 받지를 않겠습니까?
사랑의 말이라고 생각했어도 받지 않았겠습니까?
다시 말해 사랑의 말로 받아들였으면 받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하느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였을까요?
제 생각에 하느님 말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행이란 받아들이는 체계(System이)가 망가진 것입니다.
장치가 고장 난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해도 자기를 불행케 만드는 쪽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하는 말도 미워서 하는 말로 받아들이고,
충고와 경고의 말도 저주의 말로 받아들이며
회개하라는 말도 귀찮게 하는 말쯤으로 받아들입니다.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데
찰떡같이 얘기해도 개떡같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제 성찰이나 더 하겠다는 뜻입니다.
난 코라진이 아니야! 할 수 있을까?
나도 벳사이다가 아닐까?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