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입다는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정확하게 한 주일 후 저는 온라인 신학원에서
<미사의 신비와 영성>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강의에서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입다 얘기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전쟁에 나가면서 서원을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승리하고 돌아올 때 처음 환영나온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그런데 처음 환영나온 사람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습니다.
제가 미사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의 예배와 우리 미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개신교의 예물과 우리 제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배와 달리 우린 왜 제사인 미사를 봉헌해야 하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인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생제물을 꼭 원하시는가?
이 질문은 오늘 입다가 왜 굳이 서원하고,
희생제물을 봉헌하려고 했는지에 관한 질문과 일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희생제물을 봉헌하지 않으면 구원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은 번제물도 희생제물도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희생제물을 원하고,
희생제물을 바쳐야 원하는 것을 들어줍니까?
우리 부모만 해도 그러지 않고 오히려 반대지요.
자녀를 위해 당신을 희생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부모님에게 희생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뇌물을 바쳐야만 원하는 것을 주는 권력자로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생각으로 바치는 것을 부모는 기뻐하지 않고 극대노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하고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부모의 사랑에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부모님께서 가장 좋아하실 만한 것을 사랑과 정성을 담아 드릴 것입니다.
입다가 번제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도 이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고
하느님께서 희생제물을 원하시기 때문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사실 봉헌으로 치면 하느님의 봉헌이 우리의 봉헌보다 먼저이고
더 큰 사랑과 더 큰 희생의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제물인 성체를 모시기 전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하며 노래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입다가 희생제물을 바친 것은 하느님의 요구 때문이 아닙니다.
입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곧 정성 어린 희생제물입니다.
이런 입다에 비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나를 봉헌하려는 마음이 너무 없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의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매일 받아먹으면서
감사하는 마음과 나를 봉헌하려는 마음은 하나도 없거나
있더라도 제물이 아니라 예물로 때우려고 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