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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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또 다른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신 예수님
그때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라고도 하고 예언자 기운데 한 분이라고도 한다’며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전한 대답이 당신의 존귀함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암시하시며 그들을 더 고원한 깨달음으로 인도할 두 번째 물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또 다른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군중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 두 번째 물음을 던지십니다. 그들은 당신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위대한 기적들을 행하신 것을 보았고 그분을 인간으로 보기는 했지만 헤로데가 생각했듯이 다시 살아난 인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줄곧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으며 나와 함께 많은 이적을 행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돌파는 우리 쪽에서 하는 것이지 하느님 쪽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들어갈 필요가 없이 이미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카르트는 이것을 부활한 그리스도, 곧 잠겨진 문을 뚫고서 제지자들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실체와 결부시켜 말한다.
전에 나는 어떻게 우리 주님이 부활절에 잠겨진 문을 뚫고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모든 다름과 모든 인위적인 것을 여읜 사람에게로 먼저 들어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이미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돌파는 하느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문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돌파는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이미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의 돌파이자, 하느님이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돌파를 일컬어 가장 충만한 기쁨이라고 부른다. 그 어떤 기쁨도 이러한 합일, 이러한 돌파, 이러한 기쁨과 견줄 수 없다. 돌파는 “폭넓고 충만한 존재 속에서 순전히 하느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과 사물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돌파하는 법, 사물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는 법, 하느님을 강력한 분으로 그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엑카르트는 깨뜨림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열매의 핵 내지 사물의 핵에 도달한 것을 누누이 말한다. “조개의 안에 있는 속살아 밖으로 나오려면, 껍데기가 깨져야 할 것이다. 조개의 속살을 얻고자 한다면, 껍데기를 깨뜨려야 할 것이다."(442)


<금주간 성서읽기> 1베드 3-5장 / 2베드 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이중의 암흑벽
루치아가 뽈또에 체류했던 4년 동안,
그녀를 찾아온 단 한 사람의 친구도 없었고,
단 한 사람의 선생도 없었으며,
파티마의 사정을 알려준 방문객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스스로조차도 단 한 번도 그 성스러운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성당에서, 자습실에서, 휴식 시간마다, 밤의 침실에서도
파티마를 생각했고,
고바 다 이리아의 귀부인(성모 마리아)을 깊이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침묵을 맹세했고,
그 맹세를 충실히 지켜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침묵은 그녀에게 이중의 벽이 되어
숨 막히고 옹색한 감옥처럼 그녀를 가두고 말았습니다.
오른쪽을 향하면,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비밀의 벽이 가로막혀 있었고,
왼쪽을 향하면,
늘 마음속에 있는 파티마에 대한 소식조차 전혀 알 수 없는 벽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 자신이 직접 하늘로부터 받은 메시지에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지독한 시련이자 극단적인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순례가 계속되고 있을까?”
“많은 이들이 모이고 있을까?”
“파티마의 주임신부는 고바의 순례자들을 돌보고 있을까?”
그녀의 마음은 늘 질문으로 가득했지만,
그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기숙사 생활 3년째 되던 해,
그녀는 공식 조사 위원회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24년 7월 8일,
파견된 조사위원이 극비리에 그녀에게 심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
주교님께서 성모 발현에 대해 신심 행위를 허가하셨는지,
과격파가 고바에 모여드는 군중을 막았는지—에 대해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전,
그녀는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로사리오의 성모님께 기도하기 위해 모여드는 군중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특히,
1920년 5월 13일,
소성당에서 최초의 파티마 성모상 축성식이 거행되었을 때,
출동한 군대가 압박을 가하려 했지만,
군중에 밀려 오히려 양보하게 된 그날의 장면은
그녀의 기억 속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아 있었습니다.(214)